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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과 시작/유재용·소설가(로터리)
입력1997-12-20 00:00:00
수정
1997.12.20 00:00:00
유재용 기자
대자연에는 순환이 있을 뿐 시작도 끝도 없다. 단지 사람의 눈에 시작과 끝이 있는 것처럼 보이고 또한 사람들이 시작과 끝을 정해 놓은 것 뿐이다.사람들은 시작도 끝도 없이 흐르고 있는 시간을 토막 내고 짜 맞추어 연월일시를 정하고 시작과 끝을 만들었다.
인간사회에는 시작과 끝이 있다. 시작은 새롭고 힘차고 아름다우며 끝은 낡고 지쳐 있으며 서글프다. 그것은 각각의 생명체와 사회적 유기체가 타고나는 운명이다.
한 가문은 낡은 생명체가 퇴장하고 새 생명체가 등장함으로써 이어지고 번성한다.
그러나 부조의 죽음과 자손의 태어남은 그 가문을 이어가는 고리의 역할이면서도 그것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정화작용이며 새로운 충전이다.
끝은 서글프지만 그 서글픔은 시작의 활력에 거름이 된다. 인간정신은 죽음을 통해 정화되고 새로워지기도 한다. 한 사회의 갈등해소와 평화안녕을 위해 누구인가 희생 당하거나 제물로 바쳐질 때 그 사회가 정화되고 새로운 활력을 얻은 사례는 인류역사에서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시작과 끝, 끝과 시작은 죽음과 정화의 상징적 의미도 지닌다. 졸업, 정년퇴임, 떠나감, 헤어짐, 한 정권의 막내림, 한해의 끝, 한세기의 끝 등에서 사람들은 희생제물과 죽음의 정서를 간접체험한다. 그리고 그 간접체험을 통해 사람들은 자신이 정화되고 새롭게 충전되는 것을 체험한다.
사람이 살아가는 일은 어쩔 수 없이 찌꺼기를 남기게 된다. 살아간다는 것은 죄를 짓는 것이라는 말도 있다. 희생, 죽음, 끝냄을 통해서 정화되고 새롭게 시작할 수 있다.
시작도 끝도 없는 대자연의 순환을 토막 내고 구성해 시작과 끝을 만들어 놓은 것은 인류의 지혜, 그 귀한 열매가 아닐 수 없다.
우리는 지금 묵은 해를 보내고 새해를 맞는 위치에 서 있다. 한세기를 보내고 또 한세기를 맞는 위치이기도 하고 묵은 정권의 막을 내리고 새 정권의 막을 올리는 위치이기도 하다. 우선 묵은 해와 묵은 정권을 과거속으로 떠나 보내는 서글픔에 한껏 잠기도록 하자. 그리고 그 숙연함으로 우리를 정화시켜 새롭게 태어남을 생생하게 체험하면서 새 해, 새 대통령, 새 정권을 맞이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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