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감 살 돈이 없어 싼 숯으로 작업을 시작한 것이 작품 정체성 변환의 계기가 됐죠.” 1990년 유럽 여행을 하던 중 프랑스 파리의 매력을 떨쳐내지 못한 서양화가 이영배(사진ㆍ51)씨는 34살의 늦깎이 나이로 유학을 떠난다. 그림 그리고 싶다는 열정 하나로 시작한 유학생활은 그러나 가난과 언어장벽 이라는 이중고에 부딪쳐 힘겹기만 했다. 한국에선 화려한 채색의 작업을 했던 그가 남의 나라 땅에서 작가로서 살아남기 위해 택한 것은 바로 숯이었다. 그는 “세계 각국에서 ‘그림 좀 그린다’ 하는 사람들이 다 모인 파리에서 어떻게 하면 내 작품만의 개성을 살릴 수 있을까라는 것이 큰 숙제였다”며 “한국에선 거들떠 보지도 않았던 먹과 숯에 다시 보기 시작한 것이 그때”라고 말했다. 2년간 숯과 캔버스에 매달렸던 그에게 행운이 찾아왔다. 92년 파리 시내 한 전시장인 바토 라보아르(Bateau Lavoire)에 신청한 전시가 심사를 통과했다는 연락을 받았던 것. 피카소가 ‘아비뇽의 처녀’를 그렸던 작업실로 신진작가 발굴을 위해 파리시 정부가 운영하는 전시공간으로 유명한 곳이다. 숯에 대한 탐구는 진화를 거듭했다. 숯의 그으름과 아크릴을 섞은 특수 물감을 제작하고 작품의 크기도 다양화 했다. 먹으로 그린 그의 유화는 언뜻 일필휘지로 갈겨쓴 수묵화나 서예를 응용한 듯 보이지만 유럽에서는 되래 미니멀한 서양화로 인정받는다. 그는 “프랑스 친구들은 내 작품을 동양적이라고 하지 않는다”며 “동양적이다 서양적이다라는 이분법적 해석보다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현대적인 작품인가 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말했다. ‘이배’라는 이름으로 프랑스에서 활동하고 있는 그가 사간동 학고재 화랑의 재개관 첫 전시에 초대됐다. 전시장에는 최근작 30여점이 걸렸다. 지난 2월 스페인 아르코 아트페어에서 선보인 그의 작품은 첫날 매진, 추가 주문을 받아놓은 상태. 굵게 그어 내린 검은 필획의 경계선이 빛을 받아 반사하듯 은근하면서도 힘이 넘친다. 그는 “재능이나 작업방법보다 삶을 대하는 태도와 제작과정이 작가를 만든다”며 “한국이라는 정체성을 세계적인 시각으로 표현해 낼 수 있어야 세계 미술계에 설 수 있다”고 말했다. 전시는 21일부터 4월 10일까지. (02)720-1024
<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