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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수 유수기공 대표는 아침에 제품 도면을 손에 받아들면 아무리 어려운 공정의 제품이라도 저녁쯤이면 완제품을 내놓는다. 40년 넘게 쇠 냄새를 맡아온 그에겐 머리카락 굵기의 오차도 허용되지 않는다.
손재주 하나로 탱크와 미사일을 만들 수 있다는 기술 장인들이 모인 서울 영등포구 문래동 철공소 골목에는 이같은 금속정밀기계가공업체가 1,355곳 남아 있다. 1980년대말 골목마다 밀려든 주문으로 물건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던 이곳은 어느덧 평균 연령 약 53세의 소공인 집적지로 변모했다. 하지만 여전히 금속을 가공하는 기술에 있어선 문래동 소공인들이 단연 대한민국 으뜸으로 꼽힌다.
13일 기자가 찾은 문래동 철공소 골목은 연신 쇠 깎는 소리로 요란했다. 과거와 비교하면 확연히 물량은 줄었지만 아직도 30평 남짓한 공장 안에서는 기술의 향연이 펼쳐진다. 지난 1988년부터 문래동에서 일해온 유상준 씨유코리아 대표는 "문래동의 기술은 외국인들이 와서 견학하고 배워갈 정도로 뛰어나다"며 "30~40년간 쌓인 노하우를 지켜보고 있으면 절로 고개가 숙여진다고들 말한다"고 자랑한다.
문래동의 최고 절정기는 1980년대로 꼽힌다. 당시 경제가 급속도로 발전하면서 청계천에서 시작한 소규모 공장들이 영등포 쪽으로 퍼져 나왔다. 한 금속업체 대표는 "1960년대만 해도 대규모 공장으로 이뤄진 섬유, 음식료 업체들이 주류를 이뤘지만 이후 소공인들이 빼곡히 자리를 잡으면서 주문량이 많아 골목마다 차가 다닐 수 없을 정도였다"며 당시를 회상했다.
이후 대형공장들은 반월·시화 등 수도권으로 빠져나가고 제조업의 성장세가 둔화되는 길에 접어들면서 문래동은 조금씩 활기를 잃기 시작했다. 시설들은 노후해졌고, 업을 이어갈 젊은 후계자를 찾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기존 거래처도 조금씩 줄면서 생계에 어려움을 겪는 곳도 나타나고 있다.
사정이 이렇자 한국소공인진흥협회 등을 비롯해 소공인 집적지를 보존·발전시켜나가자는 움직임이 일어나고 있다. 특히 소공인협회는 문래동 소공인들을 대상으로 '소공인 경영대학'을 열어 금속가공업체들의 경쟁력 높이기에 나섰다. 올해까지 합치면 경영대학을 통해 배출되는 졸업생은 총 240명. 이들은 경영대학을 졸업 후에도 혁신사관학교 과정을 거치며 자기 혁신에 힘을 쏟고 있다. 스스로 변하지 않으면 문래동도 살아남을 수 없다는 절박함이 한 몫 했다.
이를 위해 7~10명의 업체 대표들은 원가절감 등을 주제로 한 달에 한 번씩 모여 혁신분임 토의를 가진다. 각기 다른 분야별로 기술을 공유하고 시너지를 낼 부분을 찾아내는 것. 과거에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SNS를 통해 공장 구석에 남아있는 재고부품도 공유하고, 일감이 있으면 서로 소개해주기도 한다. 김진학 진원지엔지 대표는 "지난달 목표는 원가절감과 정리정돈이었다면 앞으로는 주문제작의 형태에서 벗어나 자체적으로 제품을 개발할 예정"이라며 "현재 신제품에 설계가 70% 이상 끝났다"고 미소를 지었다.
지난해 열린 '제1회 소공인 팽이기술경진대회' 역시 문래동 소공인들의 가라앉은 분위기를 쇄신하고 팀워크를 다지는 계기가 됐다. 이 행사에서 소공인들이 자사의 기술력을 걸고 만든 직경 2cm 이하 미니 팽이로 누가 오래 살아남는지를 겨루며 우의를 다졌다. 대회를 준비한 곽의택 소공인협회장은 "소공인들은 수십 년 동안 대ㆍ중소기업의 만년 임가공업체에 머물러 왔다"며 "여기서 벗어나 우리도 도전하고 협력하면 얼마든지 창의성 있는 제품을 만들 수 있다는 자신감을 알리고 싶었다"고 행사 취지를 소개했다.
업체 대표들은 문래동이 국내 최고의 '머시닝(machining) 밸리'로 거듭나길 고대한다. 이들은 "이렇게 우수한 기술을 가진 곳들이 사라지면 국가적 손실"이라며 "공동브랜드를 만들어 함께 제작하는 등 발전방향을 모색해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이곳 소공인들이 삼삼오오 모여 기술력이 집약된 로봇 경진대회나 전국 단위의 체육대회 등을 모색하며 소주잔을 기울이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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