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요 상장사가 검찰·국세청·정치권 등 권력기관 출신 낙하산 사외이사를 임명해 논란이 이는 가운데 정작 사외이사제도는 부실운영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대부분의 사외이사는 안건에 반대하거나 수정을 요구하지 않았다. 일부 사외이사는 1년 내내 불참하거나 나중에 계열사 부당지원 의혹을 받은 안건에 찬성표를 던졌다.
서울경제신문이 11일 금융감독원 전자공시시스템에 나타난 주요 상장사의 지난 1년간 사외이사 활동내역을 점검한 결과 사외이사가 경영진을 견제한다는 애초 의미는 퇴색돼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정부의 한 관계자는 "사외이사제도는 다양한 출신의 전문가가 경영진의 독단을 견제하기 위해 마련된 것이지만 실제로는 엘리트에게 수천 만원의 용돈을 주는 제도로 전락해버렸다"면서 "10년 넘게 사외이사만 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이사회 안건을 제대로 이해하고 투표하는 경우는 적다"고 비판했다.
◇찬성만 던진 회의 몇 번에 연봉만 수천 만원=상장사의 주요 경영활동을 승인하는 이사회는 내부 출신 이사와 사외이사로 구성된다. 사외이사는 그 밖에 감사위원회나 기업의 내부통제나 투자 등을 감독하는 리스크관리위원회에도 참여한다.
그러나 실제 대형 상장사의 사외이사 활동내역을 들여다보면 사외이사가 안건에 반대한 경우는 극히 드물다. 공정거래위원회에 따르면 지난 2012년 5월~2013년 4월까지 1년간 이사회 안건 6,720건 중 사외이사 반대로 수정 의결한 안건은 0.37%(25건)에 불과하다. 삼성전자(8번), 롯데케미칼(10번), SK하이닉스(10번) 등 이사회 개최 횟수가 한 달에 한번꼴도 되지 못하는 기업도 여러 곳이다. 그러나 이들은 모두 1인당 6,000만원가량의 연봉을 받고 있었다.
사외이사 안건도 기업마다 천차만별이다. 삼성전자는 주로 1년간 경영계획안이나 특수관계인 기부금 출연, 기업생태계발전연구회 등을 이사회 안건으로 올렸다. 세부적인 경영활동 내역에 대한 안건은 다른 기업에 비해 적었다.
고객의 보험금을 운용하는 보험회사는 사외이사가 투자의 적정성 등을 판단하는 리스크관리위원회 위원장을 맡기도 한다. 그러나 금융 당국은 이 같은 리스크관리위의 전문성을 의심하고 있다. 금융감독원 관계자는 "최근 보험사의 해외부동산투자 등이 늘어나고 있지만 국내투자보다 위험한 해외투자에 대해 왜 투자했는지 리스크 관리는 어떻게 하고 있는지 물어보면 제대로 답변하지 못한다"면서 "사외이사 등이 참여하고 있지만 전문성이 떨어진다고 하고 앞으로 외부전문가를 기용하는 등의 모범규준을 마련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기업 부실이 나타난 경우에도 사외이사는 한결같이 찬성 의견만 남겼다. 현대상선은 현대종합연수원과 현대아산 유상증자에 찬성했다. 그러나 이후 검찰은 이 같은 지원으로 현대상선이 어려워졌다고 보고 이 과정에서 부당지원 여부를 수사하기도 했다. 대표이사가 1년간 구속수감 중인 SK하이닉스도 지난 1년간 10차례 회의에서 한번도 반대나 수정 의견이 없었다.
그나마 사외이사의 출석 자체가 부실한 경우도 있다. 현대상선 사외이사인 에릭 싱치 입 허치슨터미널 사장은 1년간 한번도 이사회에 참석하지 않았다. 롯데손해보험은 지난해 5월22일 첫 회의를 시작했지만 사외이사 한명은 11월 이후 사퇴해 이후 올 2월 말까지 3명이 활동했다. 그나마 그중 한명이 불참한 회의에서는 사외이사 2명이 자기주식 처분 등을 의결했다.
◇반대표 던진 사외이사도 의혹의 눈초리=유명무실해진 사외이사제도지만 일부에서는 거수기 역할을 거부하는 사례도 있다. 국민연금이 최대주주인 포스코는 지난해 3건의 안건을 수정 의결했다. 영업보고서나 재무제표에서 주당 현금배당액을 수정하거나 산소공장을 매도하면서 매도가액 표기를 명확히 하도록 주문한 것이다. 또한 차기 최고경영자(CEO)를 발굴하는 승계위원회를 운영하면서 CEO 요구 역량을 수정했다.
우리금융지주 이사회 역시 사외이사의 입김이 세기로 유명하다. 우리금융민영화 과정에서 패키지 매각 방식을 비판했고 경남·광주은행 매각 과정의 법인세를 감면하지 않으면 매각을 중단하겠다고 선언했다. 하나금융지주는 유력했던 윤용로 행장의 연임에 대해 사외이사들이 실적부진 등을 이유로 강하게 반대했다. 사외이사처럼 경영진을 감시하는 역할인 감사의 경우도 KB국민은행의 정병기 감사가 은행 정기 인사에 제동을 걸거나 은행장의 모든 결재서류를 사전 감사하고 있다.
그러나 사외이사제도 자체에 대한 신뢰가 낮다 보니 일부 사외이사의 반대 목소리에 배경이 있다고 보는 시각도 있다. 회장 등 경영진의 의중에 따라 사외이사가 움직인다는 해석이다. 우리금융의 경우는 빠른 민영화가 최대의 공적자금 회수라는 금융 당국의 인식과 헐값매각은 법적 배임이라는 사외이사 간 대립으로 민영화 자체가 난항을 겪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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