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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수답 경영·모럴 해저드·정책자금 의존등 과감히 벗어나야

[中企 변해야 산다] 상생주체로 참여하려면


선박용 엔진부품을 제조하는 L사의 대표는 최근 1차 협력사들의 납품가격 인하 압력에 하루도 편할 날이 없다. 원자재 가격이 올라 생산단가는 상승했지만 조선업 불황을 이유로 1차 협력사들의 납품가격 인하 압박이 도를 넘어섰기 때문이다. 그나마 물량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울며 겨자 먹기식'으로 단가를 낮출 수밖에 없지만 거래대금은 언제나 2~3개월짜리 어음으로 돌아오기 마련이다. 심지어 일부 1차 협력사들은 별도의 제조시설을 갖추지 않고 대기업 오더를 전량 2~3차 협력사에 하청을 주다 보니 단지 '중개 수수료'만 따먹고 산다는 얘기도 나오고 있다. L사의 한 관계자는 "건전하게 생산활동을 하는 2~3차 협력업체들은 공장을 돌리면 돌릴수록 곪아들어가는 상황"이라며 "1차 협력사의 경우 무늬만 중소기업일 뿐 사실상 대기업에 버금가는 특권층이라는 이상한 풍토가 조성돼 있다"고 하소연했다. 최근 대ㆍ중소기업이 함께 성장하는 공정사회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중소기업도 이제 달라져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현재의 왜곡된 제도나 구조를 개선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중소기업 역시 적극적으로 상생의 주체로 참여해야 한다는 지적이 일고 있다. 이를 위해서는 중소기업이 스스로의 경쟁력을 갉아먹는 문제점들을 개선하고 국내외 산업 무대에서 적극적인 플레이어로 거듭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대기업만 쳐다보는 '천수답 경영'=L사의 하소연처럼 국내 많은 중소기업들은 대기업 납품이나 내수시장에만 의존하는 천수답 경영을 반복하고 있다. 대기업 1차 협력업체라는 '지위'를 획득하면 안정적인 납품처가 확보된다는 장점이 있지만 국내 경기나 해당 대기업의 경영 상황에 따라 동반 부침을 겪기도 한다. 특히 변화하는 제품이나 기술 트렌드를 제때 따라가지 못할 경우 금세 경쟁업체들에 협력업체 자리를 내줘야 한다. 이때 중소기업들이 손쉽게 꺼내드는 카드가 '단가 후려치기'이고 이는 바로 과당경쟁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지난해부터 사상 최대 실적을 올리고 있는 완성차업계의 협력업체들도 무리한 단가 후려치기로 '제 살 깎아먹기식 경쟁'이 벌어지고 있다. 물론 대기업들의 지속적인 원가 인하 압박 탓이 크기는 하지만 '나부터 수주하고 보자'는 이기심이 업계 전체를 수렁으로 몰아가고 있다. 수도권의 한 자동차부품업체 관계자는 "과거에 마진율이 15~20%였다면 지금은 원가나 원가 이하로 가격을 써내는 업체들도 등장하고 있다"며 "매달 은행이자 상환하고 직원들 월급을 주려면 공장을 돌려야 하니까 어쩔 수 없이 가격을 후려치지만 이러다 모두 공멸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우려가 크다"고 지적했다. ◇성장 기피하는 '피터팬 신드롬'=중견기업의 외형을 갖추고서도 중소기업에 머물고 싶어하는 '피터팬 신드롬'도 중소기업의 경쟁력을 저해하는 해묵은 문제점 중 하나다. 대표적인 반도체ㆍ디스플레이업체인 A사는 지난해 1,700억원의 매출을 올렸지만 여전히 중소기업으로 분류된다. 연구인력을 제외한 고용인원이 300명을 넘지 않아 중소기업법이 명시한 '상시근로자 수 300명 미만 또는 자본금 80억원 이하'라는 기준을 충족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A사처럼 중소기업을 벗어나 중견기업ㆍ대기업으로 성장할 수 있는 잠재력이 풍부한 기업들 사이에는 중소기업에서 벗어나지 않으려고 애쓰는 관행이 이미 널리 퍼져 있다. 중소기업을 졸업할 경우 당장 160여개에 달하는 중소기업 지원제도가 끊기기 때문이다. 제2의 애플을 꿈꾸는 대신 각종 정부 지원의 울타리에 머물러 있으려는 기업들이 늘면서 정부는 최근 산업발전법 개정안을 통해 처음으로 '중견기업'의 의미를 정의하고 육성 방안을 내놓기도 했다. ◇'본업은 뒷전' 모럴해저드 여전=중소기업 스스로 모럴해저드를 벗어 던지고 건전한 경영활동으로 기업 및 국가경쟁력 강화에 기여하겠다는 도덕성 재무장에 나서야 한다는 목소리도 높다. 간 질환 치료제 전문기업인 파마킹은 지난 2000년대 초반부터 최근까지 기술신용보증기금으로부터 자금을 조달하고 상환한 횟수가 무려 34회에 달한다. 여유자금이 생길 때마다 제일 먼저 지원자금을 상환하고 또 대출하기를 반복하며 생긴 기록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기업들은 여유자금이 생겨도 저리의 정부 지원자금은 상환 시기를 최대한 연장해가며 실탄을 보유하려고 애를 쓰고 있다. 특히 지난해에는 금융위기 극복을 위해 정부에서 외환위기 이후 최대 규모의 정책자금을 지원하면서 '정책자금은 눈먼 돈'이라는 표현까지 생겨날 정도다. 업계의 한 관계자는 "시중 금융권보다 좋은 조건으로 대출을 받을 수 있는 기회라고 생각해 지난해 중소기업들이 한번쯤은 정책자금을 신청했을 정도"라고 전했다. 이 같은 정책자금 쏠림현상 때문에 정작 자금난에 시달리며 지원이 절실한 기업들은 오히려 기회를 박탈당하는 부작용을 초래하고 있다. 이 와중에 채무변제의무를 회피하기 위해 고의로 법정관리를 신청하는 기업들도 증가하고 있다. 또 일시에 은행 대출을 일으키거나 어음을 발행해 원자재를 대거 사들인 뒤 시중가의 60~70% 수준에 땡처리해 확보한 현금을 가지고 도주하는 기업인도 등장해 거래처들이 줄도산을 맞기도 했다. 지역경제 활성화를 위해 조성된 국가산업단지에서 시세보다 저렴하게 토지를 분양 받아놓고도 공장을 짓지 않은 채 몇 년씩 버티다 이후 막대한 시세차익만 거두고 떠나는 투기세력들 때문에 선량하게 경영활동을 영위하는 중소기업인들이 가슴을 치기도 했다. 박주영 숭실대 벤처중소기업학부 학부장은 "대중소기업 상생을 위해서는 양측의 공정경쟁이 전제돼야 하고 중소기업 스스로도 자립이나 경쟁력 강화에 대한 남다른 의지가 필요하다"며 "정부 정책도 무한정 지원에서 벗어나 일몰제나 졸업제 등을 적절히 활용해 적정 기간 지원함으로써 벤처기업이 중견기업을 거쳐 대기업으로 성장할 수 있는 건전한 생태계를 구축하도록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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