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립무원(孤立無援 ). 김한조 외환은행장의 현 상황을 보여주는 말에 이만큼 맞는 것이 없는 듯하다.
외환은행은 지난 4·4분기 859억원의 적자를 기록했다. 시중은행 중 유일했다. 그룹 회장은 이례적으로 지방은행과 직접적인 비교를 하면서까지 수익성을 질타했다. 어느 시중은행보다 엘리트의식이 강한 외환은행 직원의 사기는 땅으로 떨어졌다.
엄밀히 따지면 외환은행의 실적 부진을 김 행장의 탓으로 돌리기는 어렵다. 김정태 회장 역시 지금의 실적 부진은 론스타가 남긴 유산이라고 평가했다. 하지만 행장은 상징성이 강한 자리다. 원인이 따로 있다 하더라도 행장 입장에서는 부담감을 느낄 수밖에 없다.
김 행장은 조기통합 협상에서 실질적인 선장 역할을 맡아왔다. 하지만 노조는 행장이 아닌 김 회장, 신제윤 금융위원장과 싸우기를 원했다. 결과적으로 김 행장은 의미 있는 성과를 도출해내지 못했다. 노조가 회심의 카드로 준비한 통합작업 가처분 신청은 부분인용 판결로 이어졌고 김 행장은 실무협상을 주도해온 임원 셋을 한꺼번에 잃었다.
내부의 저항은 더 사무친다. 노사 간 대화는 실종됐다. 수개월 동안 이어져온 '3시의 만남'은 지난달 27일 이후 사라졌다. 사측 대표단은 매일 3시 을지로 외환은행 본점 15층에 마련된 협상장을 찾지만 노조는 나타나지 않고 있다. 협상장에 나와야 할 노조는 광화문 금융위원회 앞에서 시위를 벌이고 있다.
김 행장은 외환은행 40년 역사의 마지막 행장이자 초대 통합은행장이 유력했다. 하나금융지주는 하나은행장 선출작업을 일시 멈추면서까지 기회를 부여했다. 그러나 가처분이라는 복병을 만난 지주는 김병호 하나은행장을 선임했다. 통합은행장의 무게중심은 급속히 김병호 하나은행장 쪽으로 이동하는 분위기다. 지난해 11월 김종준 행장 사퇴 이후부터 주어진 3개월이라는 골든타임은 무효가 된 셈이다.
맏형 리더십으로 통하는 김 행장이 후배(노조)들의 저항을 넘지 못하고 샌드위치 신세에 빠진 점은 더욱 아쉽다.
외환 노조는 지난 9일부터 투쟁기금 모금에 들어갔다. 34억원이 목표다. 노조가 매년 약 20억원의 조합비를 거둔다는 점을 감안하면 50억원이 넘는 실탄을 확보하게 된다. 다분히 장기투쟁의 의지가 담겼다.
물론 김 행장에게도 아직 기회는 남아 있다. 김 행장은 노조를 설득해낼 수 있는 유일한 대안이다. 하나금융이 초대 통합은행장으로 김 행장 카드를 염두에 둔 것도 외환은행 식구들을 달랠 수 있는 대안으로 봤기 때문이다. 노조와의 극적 합의만 이뤄내면 김 행장은 다시 일어설 수 있다.
그러나 전망은 불투명하다. 금융당국의 측면지지로 조기통합은 하나금융 사측이 승기를 잡았지만 법원의 판결 이후 주도권을 쥔 쪽은 노조로 바뀌었다. 노조는 9일 조합원들에게 보낸 지침을 통해 투쟁 수위를 다시 높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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