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질적인 불공정거래로 국내 영세 디자인전문회사들이 고사 상태에 빠지고, 디자인산업이 전략 부재로 답보 상태를 벗어나지 못하자 디자인을 전략산업으로 육성하는 범국가적인 노력이 시급하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디자인업계 관계자들은 ▦정부 중심의 디자인 전략 수립과 투자 규모 확대 ▦불공정거래 등 발전 저해 요소 제거 ▦디자인을 전략산업으로 인식 전환 ▦중소기업들의 디자인 관심 고취 ▦디자인업계 스스로의 결속 강화 등이 이뤄져야만 디자인산업이 핵심 지식서비스산업으로서의 제 역할을 할 수 있다고 강조하고 있다.
23일 디자인업계에 따르면 420억원 수준의 한국디자인진흥원 예산을 포함, 디자인과 관련한 지식경제부 투자액은 전체 국가 산업 R&D 예산 가운데 채 1%에도 못 미치는 것으로 파악됐다. 지난 10년간 산업 R&D 전체 정부지원액수는 두배 이상 늘었지만 디자인 분야는 50% 밖에 증가하지 않은 셈이다.
아울러 현 정부가 디자인산업 육성이라는 번듯한 구호만 4년째 외치면서 '무전략'으로만 대응하고 있는 게 아니냐는 비판도 높은 실정이다. 정부가 대기업의 자체 디자인투자액 증가분에 함몰돼 디자인산업의 실질적인 질적ㆍ양적 발전 도모에는 등한시하고 있다는 주장이다.
모 대학의 한 산업디자인학과 교수는 "국가 산업 R&D 예산 가운데 일정 규모를 디자인에 투자하도록 보장하는 제도를 계속 건의하고 있지만 전혀 변화가 없다"고 지적했다. 디자인진흥원의 한 관계자도 "디자인진흥원 예산이 최소 1,000억원 수준은 돼야 제대로 된 정책을 수립할 수 있다"며 "디자인산업의 부가가치가 엄청나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고 말했다.
범국가 차원의 디자인산업 전략 수립과 실천도 중요하지만 불공정거래, 지적재산권 침해 등 시장저해 요소를 근절하는 것도 시급하다. 디자인업계에 대해 기본적인 안전판을 만들어주지 않으면 정부가 아무리 투자를 해도 '밑빠진 독에 물 붓기'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디자인진흥원의 '디자인 기업 피해사례 실태조사 보고서'에 따르면 디자인전문회사 가운데 47%와 34%는 이에 대한 법률지원서비스, 디자인표준계약서 및 디자인대가 기준 등을 시급히 마련해야 한다고 보고 있다. 또 42%는 불공정거래 관련 분쟁해결을 위한 대행기관이 필요하다고 호소했다.
디자인을 하나의 산업으로 받아들이는 인식 전환도 요구된다. 디자인을 산업으로 바라보지 못하다 보니 수백~수천만원대의 싸구려 프로젝트만 남발하게 된다는 얘기다. 많은 디자인전문회사들이 자체 투자 비중이 높은 대기업보다는 공공 발주에 대부분의 매출을 의존하는 점에 비춰 디자인에 대한 정부의 경직된 사고를 개선하는 게 중요하다는 것. 지식경제부의 담당 부처 이름부터 같은 성장동력실에 있는 '로봇산업과', '소프트웨어산업과' 처럼'디자인브랜드과'가 아닌 '디자인산업과'로 바꿔야 한다는 의견도 나온다.
한 디자인전문회사 대표는 "그나마 기업들은 디자이너의 역량에 따라 프로젝트를 맡기는 편인데 정부나 공공기업은 디자인회사의 실적을 보고 수주를 맡기다 보니 업계에서 유명한 디자이너가 정작 공공 프로젝트는 하나도 못 맡는 황당한 상황도 자주 발생한다"며 "정부 지원이 늘면 더 좋겠지만 이미 배정된 예산만이라도 제대로 썼으면 좋겠다"고 당부했다.
이와함께 대기업은 자체 투자 중심으로 움직이고 있고 공공투자만으로는 시장 육성에 한계가 있다는 점을 감안, 디자인에 대한 중소기업의 관심과 인식부터 높여야 한다는 제안도 귀를 기울일 대목이다. 디자인진흥원에 따르면 현재 중소기업 가운데 디자인을 활용하는 기업은 전체의 13% 정도밖에 안된다. 이마저도 대부분 연간 투자액이 1억원 미만인 것으로 집계되고 있다. 정책 방향만 제대로 수립하면 중소기업계와 디자인전문회사들이 충분히 상생할 수 있는 길이 열릴 수 있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디자인업계부터 스스로 단결력을 더 높이는 등 내부 노력에 더 힘쓸 필요가 있다. 디자이너 대부분이 예술가적 기질 때문에 업계가 한 목소리를 내기가 어려웠는데 산업발전을 위해서는 더 이상 사분오열해서는 안 된다는 고언이다.
디자인업계의 한 관계자는 "디자인업계의 오피니언 리더라고 할 수 있는 대학 교수들조차 디자인을 예술로서만 이해하려 하지 산업의 관점에서 보는 시각은 매우 약하다"며 "디자이너 대부분이 그동안 각자 먹고 살기도 힘들어 단결을 못했지만 이제는 힘을 합쳐 디자인업계가 필요한 부분을 계속 부각할 필요가 있다"고 역설했다.
<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