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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환위기 그후 10년] (6) 정부가 기업운명 쥐락펴락 구조조정의 빛과 그림자 부실기업 키우고…죽이고 '무소불위'69년 부실차관 기업 지정…'수출 1위' 천우등 사라져全정권, 중공업 통폐합 조치 이어 해운사등 무더기 정리환란후 금융기관 중심 구조조정…"기업회생과 거리 멀어" 이종배 기자 ljb@sed.co.kr 1964년 12월 5일 서울시민회관(현 서울시의회). 사상 처음으로 수출 1억 달러 돌파를 기념해 마련된 ‘제1회 수출의 날’ 행사에서 천우사(47년 창립)와 삼성물산(48년)은 박정희 대통령으로부터 대통령 표창을 받는다. 무역회사인 천우사는 5.16 직전 상공부 장관을 지낸 전택부씨가 사장으로 재직하고 있던 업체.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보세 가공무역업을 해 60년대 초우량 회사로 성장했다. 하지만 천우사와 삼성물산의 운명은 얼마 지나지 않아 엇갈린다. 천우사의 수명은 길지 못했다. 60년대 초반 경제개발 5개년 계획으로 삼성물산과 더불어 승승장구 했던 이 회사는 69년 5월 ‘부실차관기업’으로 지정돼, 기업주 재산까지 몰수 당하면서 사라진다. 한국 기업의 첫 구조조정은 이렇게 시작됐다. 69년 정부가 천우사, 대성목재 등 30개 기업을 부실차관 기업으로 지정한 것이다. 80년대에는 중화학공업 투자조정, 건설ㆍ해운업 합리화에 이어 90년대 말 외환위기 극복을 위한 구조조정으로 까지 연결된다. 우리나라 기업구조조정 역사를 보면 정부가 상당부분 원인을 제공했고, 구조조정을 주도했다는 특징을 가진다. 한마디로 병 주고 약주는 셈이다. 60년대 부실차관기업은 정부가 외자 도입에 따른 정부 보증(66년 개정)이 만들어 냈다. 80년대 중화학 공업 및 건설ㆍ해운업 구조조정은 70년대부터 추진해온 중화학공업 육성 정책이 단초를 제공했다. 외환위기 당시 구조조정은 60~80년대 구조조정을 거치면서 정부가 키운 재벌이 그 밑바탕이 됐다. ◇정부 주도 구조조정의 시작 = 박정희 정권의 외자유치를 통한 국가성장 전략에 맞춰 기업들은 외부차입에 의존한 사업확대에 나선다. 66년에는 해외에서 돈을 빌리기 힘든 기업들에 정부 명의로 지급보증을 하도록 외자도입법을 개정하기까지 했다. 그 결과 기업의 전체 자금 조달 중 외부자금 비중이 70%를 넘었고, 이는 부실 차관 기업의 속출로 귀결됐다. 박정희 정권은 이 같은 문제를 해결하기위해 1969년 5월부터 1단계로 천우사 계열 등 30개 업체를 부실차관 기업으로 지정하고, 제2단계(70년)로 은행관리기업 56개 업체를 선정, 정리한다. 한국에서의 첫 대규모 구조조정이 정부주도로 이뤄진 것이다. 이 과정에서 수출 1위 기업인 천우사를 비롯, 삼호, 화신, 아세아자동차, 대성목재 등이 사라졌다. 60년대 30개, 70년 56개의 부실기업을 정리한 정부는 1972년 8ㆍ3 사채동결 조치를 단행하고, 산업합리화 정책을 구사했다. 산업합리화정책은 한마디로 집중적으로 육성할 기업을 지정하고, 그 업체에 정부가 각종 금융 및 조세혜택을 주는 것이다. 산업합리화 업종은 총 61개가 지정 됐는데, 그 가운데 경공업 분야는 10개에 불과했다. 산업합리화 정책은 결국, 중화학공업 육성책이었다. 이는 70년대말 중화학공업 과잉투자로 귀결됐고, 또 다른 구조조정을 불러오게 된다. ◇정부가 기업을 나누다 = 70년대말 오일쇼크는 또 한번의 대대적인 부실기업 정리를 불가피하게 했다. 1979년 중복ㆍ과잉투자에 따른 문제점과 정책대안을 제시한 ‘4.17 경제안정화 시책’은 신군부에 구조조정 원칙을 제공했다. 당시 주요 중화학업종의 가동률이 40~60% 수준에 머물렀다. 반면 생산 재원은 중화학에 묶여있어 다른 분야에는 활용되지 못하는 등 경제가 심각한 불균형 상태를 유지했다. 전두환 정권은 1980년 8월 중공업 통폐합 조치와 같은 해 9월 2차 투자조정 조치를 내놓았다. 주요 내용은 발전설비는 대우그룹으로 일원화 하고, 한국중공업을 설립하며 건설중장비는 삼성ㆍ대우ㆍ현대중공업, 비승용차는 현대자동차와 새한에 맡기고 중전기분야에서는 코오롱을 효성중공업으로 흡수통합하는 것 등이다. 장석인 산업연구원실장은 “당시 구조조정은 대규모 산업투자에 대해 정부가 직접적인 조정을 가했다는 산업정책적 의미를 갖는다”고 설명했다. 이어 1984년 7월에는 경남기업을 대우에 인수시켰고, 85년 2월에는 국제그룹을 해체했다. 이어 해외건설업체와 해운회사에 대한 무더기 정리조치도 단행됐다. 정리방식은 합리화 기업 지정과 제3자 인수. 83~84년 사이에 해운회사 63개가 17개로 통합됐다. 전체적으로는 부실기업 정리대상이 된 기업은 총 78개였으며 이 가운데, 57개 기업이 제 3자에게 넘어갔다. 이 때 타 기업을 인수한 기업은 한일합섬, 동국제강, 우성건설, 대림산업, 대우그룹, 한진그룹 등이었다. 기업 정리 과정에서 각종 금융ㆍ세제지원이 주어졌다. 역사의 반복일까. 금융ㆍ세제지원 등으로 덩치를 키운 기업들 가운데 상당수는 1997년 외환위기를 맞아 구조조정을 당하는 비운을 맞게 된다. ◇금융기관 중심의 구조조정 = 1997년 외환위기에 따른 대기업 연쇄부도는 새로운 형태의 기업 구조조정이 요구 됐고 이 때 탄생한 것은 워크아웃 제도다. 이를 기점으로 구조조정은 정부 주도 하에서 금융기관 중심의 구조조정으로 전환되게 된다. 아울러 개별 기업단위 금융ㆍ세제 특혜 대신 금융기관에 대한 공적자금 지원 형태가 자리잡게 된다. 이러한 수차례의 구조조정은 ▦불투명한 구조조정 원칙 ▦인수기업에 대한 특혜지원 등 많은 숙제를 남겨놓았다. 실제로 중화학공업에 대한 구조조정만도 중화학공업 등 주요 산업의 과잉투자 조정이라는 대의 명문에도 불구하고 정치적 의도가 짙게 깔려 있었다. 외환위기이후의 구조조정에서도 이 같은 측면이 적지 않게 작용했다. 장 실장은 “80년대 해운업을 정리 했는데 그 후로 해운업이 해외로 나가면서 조선업의 경우 국내 수요가 거의 없게 됐다”며 “일시적 과잉투자 부분까지 만성 중복투자로 몰고 간 실수를 범했다”고 지적했다. 지난 65년 국내 100대 기업 중 1997년까지 생존한 기업은 13개에 불과하다. 30년간 생존률이 13%에 그친 것. 이는 미국(21%), 일본(22%)에 비해 훨씬 낮다. 65년 당시 10대 기업 중 10위권을 유지하는 기업은 없으면 그룹으로는 삼성과 LG 뿐이다. 이 같은 우리기업의 ‘단명’은 외부지원을 통한 성장과, 정부주도의 타율적 구조조정의 영향을 상당부분 받았다는 게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금융기관 중심의 구조조정도 문제가 없지는 않다. 금융기관이 주도의 구조조정은 기업 회생 보다는 부채비율 축소 등 재무 건전성에 초점이 맞춰지게 마련이다. 때문에 구조조정이 기업 회생과 산업 경쟁력 강화와는 거리가 멀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송태정 LG 경제연구원 연구위원은 “과거 기업 구조조정은 외환위기 등 외부에서 압력이 가해진 것이 특징이었는데, 지금은 기업들 스스로 생존하기 위해 몸부림 치고 있다”며 “이 과정에서 기업의 해외 이전에 따른 자본유출, 그리고 일부 돈 되는 산업에 대한 집중 투자 등이 다시 문제로 떠오르고 있다”고 지적했다. '경제계, 국민이 온갖 정력을 경주한 결과 입니다' . 박정희 전 대통령은 1964년 12월 5일 수출 1억 달러 돌파 기념으로 서울시민회관에서 열린 '제1회 수출의 날 행사' 에서 떨린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이날 삼호무역, 천우사, 영풍상사, 동명목재, 삼성물산 등이 대통령 식산 포장을 받았다. 하지만 이들 기업 중 상당수는 정부 주도 하에 진행된 구조조정으로 현재는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사진제공=무역협회 입력시간 : 2007/01/31 16: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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