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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기명 장기채권 도입(논쟁)
입력1997-12-11 00:00:00
수정
1997.12.11 00:00:00
정영헌 기자
무기명 장기채 도입문제가 또다시 쟁점으로 부각되고 있다. 김영삼 대통령을 비롯한 정부는 무기명 장기채 도입이 금융실명제의 근간을 흔드는 것이어서 도입할 수 없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반면 대선에 나선 3당후보는 저마다 무기명 장기채 도입을 공약으로 내세으고 있다. 무기명 장기채 도입에 반대하는 논리는 현금으로 사장된 자금이 있다해도 소액에 그칠 것으로 추정되는 반면 수년간의 시행착오끝에 간신히 정착한 실명거래 원칙이 무너지게 된다는 것이다. 또 무기명 장기채 도입으로 인해 상속·증여세의 탈루까지 예상되는등 조세형평이 훼손될 우려가 크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무기명 장기채 도입 찬성론자들은 현재 금융시장이 마비되고 국고가 바닥나 정부지원이 한계에 달하는등 우리경제가 정상적인 형편이 아니라는 상황론을 들고 있다. 기업이 연쇄 도산하고 근로자의 대량실직이 우려되는 상황에서 장롱속에 사장된 자금을 일부라도 끌어내어 사태를 호전시킬 수 있다면 사실상 정치구호가 된 실명제 원칙을 고집할 이유가 없다는 주장이다. 무기명 장기채 도입을 둘러싼 찬반 논쟁을 민관 경제연구기관전문가들의 기고를 통해 정리한다.<편집자 주>◎찬성/지하자금 양성화 돈가뭄 해소/자금난 금융기관 부실채권 신속정리 도움/중기긴급수혈 연쇄도산 방지·증시부양도/자금출처조사 면제땐 부담금 물려 공평과세 실현 가능
연일 금리와 환율이 폭등하고, 주가가 푹락하면서 금융대란의 우려가 고조되고 있는 가운데 정부가 금융시장 안정대책을 내놓았다.
5개 종금사의 업무를 추가 정지하고, 모든 은행에 CP업무를 전면 허용하며, 종금사 및 증권사에 콜자금 지원을 확대한다는 것이 주내용이다. 금주들어 일부 종금사와 증권사가 당일 결제를 못하자 다음날 정부가 시중은행을 독려하고 한국은행이 나서서 겨우 결제해 부도를 막아 왔다.
금융시장의 붕괴가 마치 초읽기에 들어간 것처럼 시시각각으로 악화되는 가운데 정부가 뒤늦게 대책을 발표하였으나 현재의 금융시장 혼란을 잠재우기에는 미흡하다. 문제는 정부가 필요한 자금을 금융기관 및 기업에게 지원할 수 없기 때문이다. IMF에 구제금융을 받는 조건으로 정부의 재정지출과 한국은행의 자금공급이 모두 묶여 있으며, 설사 지원하려고 해도 현재 정부도 국고가 부족하여 자금을 지원할 수 없는 실정이다. 정부는 최근 신용관리기금을 지원하기 위해 2조원 규모의 현물출자를 추진하였으나 이를 포기하고 대신 채권발행을 계획하고 있다. 마치 한국은행의 외환보유고가 부족하여 외환위기가 빠르게 악화된 것처럼 국고가 부족하여 금융위기가 확산되고 있는 것이다. 이런 가운데 기업의 부도가 줄을 잇고 있으며 지난 2일에는 어음부도율이 지난해 평균보다 30배 수준인 7%에 달하였으며 매일 1백여개 이상의 업체가 쓰러지고 있다. 이것이 우리 경제의 실상이다.
금융실명제는 모든 금융거래를 투명하게 하여 경제비리를 원천봉쇄하고 공평과세의 경제정의 실현을 위해 모든 금융소득을 종합과세한다는 목적 아래 전격 도입돼 시행되어 왔다. 이와같은 금융실명제의 취지에 대하여 반대하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우리 경제가 정상적인 상황이라면 이제는 지금까지 비교적 순탄하게 시행되어온 금융실명제를 정착시키기 위해 도입당시의 취지를 살려 현재 대통령긴급명령으로 되어 있는 금융실명제를 대체 입법하는 일이다. 그러나 현재 우리 경제는 정상적인 상황이 아니다. 금융시장이 마비되고 금융시스템이 붕괴되기 직전에 놓여 있으며 경제의 혈액과 같은 자금이 기업에게 제대로 흐르지 않고 있다. 특히 중소기업 및 영세상공인이 의존하고 있는 자금의 모세혈관은 빠른 속도로 막히고 있다. 더욱 안타까운 것은 정부가 나서서 할 수 있는 수단이 별로 없다는 것이다. 현재IMF는 그동안 한국은행이 제2금융원에 지원해 준 자금을 회수하라고 요구하고 있으며 정부재정지출은 7조원 이상 줄이도록 강요하고 있다. 만일 IMF의 제약이 없으면 한국은행은 한시적이라도 무제한적으로 자금을 금융시장에 공급할 수 있으며, 정부도 신용보증기금을 통해 중소기업에게 긴급자금을 지원할 수 있다. 실제로 정부는 93년 금융실명제 도입 직후 금융경색 완화와 기업의 자금난해소를 위해 유사한 조치를 시행한 적이 있다.
IMF관리체제에서 정부가 할 수 있는 수단은 자금의 여유가 있는 금융기관들이 자금부족을 겪고 있는 금융기관이나 기업들에 자금을 지원토록 독려하고, 국민들에게 예금을 인출하지 말며 장롱속에 둔 외화를 금융기관에 맡겨달라고 호소하는 일이다. 그러나 정부가 지분을 보유한 은행도 정부의 종금사 지원요청에 대해 난색을 표하고 있으며, 정부를 신뢰하지 못하는 국민들은 부실 금융기관으로 지목되는 금융기관에 맡겨 둔 예금을 인출하고 있다. 중소기업중앙회 회장은 며칠전 TV토론에 나외서 현 상황이 지속될 경우 우리나라 중소기업 가운데 절반이 망할 수 있다고 경고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3당 대통령 후보들은 한결같이 무기명 장기채권 도입을 요구하고 있다. 무기명장기채권 도입시 채권이 제대로 팔릴지는 누구도 장담할 수 없는 형편이다. 그러나 국고가 바닥난 상황에서 무기명장기채권을 발행하여 사장된 자금을 일부라도 끌어내어 부실채권정리기금의 재원마련과 중소기업의 도산을 막는데 사용할 수 있다면 당장에 도입하여야 한다. 아직도 일각에서 무기명 장기채권도입은 금융실명제의 근본취지를 훼손시킨다고 반대하고 있다. 그러나 기업의 연쇄도산으로 직장을 잃는 근로자들, 사업체가 부도나 빚쟁이에 쫓겨 도망다니는 사업가들, 장사가 안 돼 가게를 닫아야 하는 많은 영세상인들에게 무기명 장기채권 도입반대는 사치스러운 이야기로 들릴 것이다. 내년이면 1백만명 이상의 근로자가 직장을 잃고 거리로 나오게 된다는 전망인데 이런 상황에서도 무기명장기채권 도입을 반대한다면 이는 참으로 경제정의에 대한 의식이 매우 투철하거나, 아니면 다른 사람의 어려움에 별로 신경을 쓰지 않는 사람일 것이다.
현정부는 3당대선 후보가 모두 무기명 장기채권발행 도입을 요구해도 이를 주저하고 있는데 다행스럽게 선거가 이제 7일밖에 남지 않았다. 선거 직후 대통령당선자는 무기명 장기채권의 즉각적 도입을 추진하고, 채권판매로 마련한 재원을 부실 금융기관 정리자금 및 중소기업 지원자금으로 즉시 사용해야 할 것이다. 한편 무기명 장기채권 도입시 자금출처조사면제와 함께 공평과세 측면에서 일정수준의 부딤금(일명 도강세)을 물려야 할 것이다. 그러나 과거와 같이 과중한 부담금을 매겨 팔리지 않는 채권을 만드는 우를 범해서는 안된다.<김세진 한국경제연 금융조세실장>
▷약력◁
▲연세대 경영학과 졸
▲미국 예일대 경제학 박사
◎반대/실제 지하자금 규모 많지않다/현금통화 14조3천억 사장된 돈 30조 “과장”/실명자금이 되레 무기명이동 역효과 초래/돈세탁·금융소득 과세회피 수단우려 “실명제 훼손만”
금융실명제의 근본은 유지하면서 무기명채권을 발행하자는 것은 모순이다. 무기명 채권의 발행은 금융실명제의 포기라 할 수 있다. 금융실명제를 포기해서 우리 경제가 어려움을 극복하고 장기적으로 건실한 발전을 이룩할 수 있다면 당연히 그렇게 해야 한다. 그러나 금융실명제는 금융기관과의 금융거래시 실지 명의에 의해서 하는 것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나라의 경제가 어려울수록 해야할 일과 하지 않아야 할 일을 냉철하고 명확히 구분해야 한다. 중병이 든 환자일수록 약에 대한 부작용이 클 가능성이 있으므로 신중한 진료를 통한 처방이 필요하다. 부작용에 대한 면밀한 검토가 없이 내리는 처방은 환자의 병세를 악화시킬 가능성이 크며 나아가 치유 불가능한 상태로 빠지는 치명적인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다. 따라서 환자의 상태를 세밀하게 살펴서 발병의 원인을 분석하고 이에 합당한 처방을 내리는 접근이 적절하다.
우리 경제가 처한 어려운 국면을 극복하기 위한 한 방안으로 금융기관 부실채권의 신속한 정리, 증권시장의 부양과 금융저축의 확대가 긴요하다는 논리 하에 일각에서 무기명채권의 발행을 요구하고 있다.
우리가 처한 경제 위기를 극복하는 방안으로 무기명채권을 발행하자는 논리는 금융실명제의 실시로 제도금융권을 이탈하여 사장된 자금규모가 약 30조원에 이른다는 언론보도에 근거하고 있다. 이는 우리나라 지하경제의 추정 규모와 사장된 현금 규모와의 개념상 혼돈에 기초하고 있다.
통화자료에 의한 방법을 이용하여 1995년 우리나라 지하경제 규모를 추정한 결과 국민총생산(GNP)대비 8.9%에 이르는 것으로 추정되었다(1995년 경상GNP는 3백48조9천7백93억원). 여기서 정의하는 지하경제 규모는 세금없이 창출된 국민소득 규모로서 사장된 현금 규모와는 무관하다. 1997년 9월 현재 현금통화규모의 잠정치가 14조3천1백60억원임을 감안할 때 30조원에 이르는 사장현금이 있다는 주장은 근거가 없음을 무기명 장기채권 발행여부를 검토하기 전에 확실히 할 필요가 있다.
총통화에서 현금통화가 차지하는 비율의 추세를 이용하여 초과 현금 보유액을 추정해본 결과 그 규모가 크지 않은 것으로 추정되어 무기명채권의 발행으로 흡수될 수 있는 사장된 현금 규모는 미미할 것으로 예상된다. 무기명채권의 발행은 사장된 현금의 제도권 유입보다는 오히려 무기명을 선호하는 기존제도권 자금의 수평이동을 초래할 것으로 예상된다.
무기명채권의 발행을 검토하기 위해서는 수단의 타당성 여부와 목적 달성의 실효성 여부를 검토할 필요가 있다. 무기명채권 발행은 금융실명제의 근간을 훼손하고 우리나라 조세 전반의 체계를 흔드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므로 타당한 방법이라 할 수 없다.
무기명채권을 구입한 사람은 금융소득 종합과세를 회피할 수 있으며 채권의 발행 형태에 따라 상속·증여세를 회피할 가능성이 있다. 무기명채권으로 빠져나간 재원에 대한 향후 자금추적이 불가능하고 무기명채권의 주수요자가 고소득층임을 감안 할 때 조세형평성에도 심대한 악영향을 미칠 것이다.
보다 근본적으로 현재 실명으로 거래되고 있는 자금마저도 왜곡시킬 가능성이 크다. 시중자금의 흐름이 수익률에 의한 것이 아니라 기명·무기명의 여부에 크게 영향을 받을 경우 기실명화된 자금도 무기명채권으로 유입될 가능성이 있는등 금융시장의 왜곡이 심화될 가능성이 있다.
다음으로 무기명채권 발행이 성취하고자 하는 정책목표를 효과적으로 달성할 수 있는 지에 대한 실효성을 분석할 필요가 있다. 앞에서도 지적하였지만 시중에 사장된 현금규모가 크지 않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따라서 무기명채권 발행이 목적하는 사장된 현금의 제도권 유입은 실효를 거두기 어려울 것으로 예상된다.
설혹 사장된 현금이 상당규모 존재한다고 하더라도 이 자금이 무기명채권으로 유입되어 실효를 거둘 가능성은 무기명채권의 발행조건에 달려 있다.
자금출처조사 면제 무기명채권의 발행으로 인한 상속·증여세 면탈효과를 상쇄하기 위해서 이자율을 저리로 할 경우 실효성은 미흡한 반면 자금세탁의 도구로 활용될 것이다. 또한 사채시장에서의 자금운용과 무기명채권 구입의 경제적 편익과 비용을 분석하면 무기명채권 구입의 상대적 이점을 찾기 어렵다.
무기명채권의 발행으로 주식시장을 부양한다는 것도 논리적으로 맞지 않는다. 기본적으로 채권은 주식과 대체적인 성격이 강한 자산이므로 무기명채권을 매개로 제도금융권에 편입된 자금이 주식시장으로 유입될 가능성은 희박하다.
결론적으로 무기명채권의 발행은 실효성없이 금융실명제만 훼손하는 결과를 초래할 가능성이 크다. 비록 금융실명제가 금융기관과의 거래시 실명에 의해서 하자는 조그마한 원칙일지라도 이의 확립은 지금 우리 경제의 어려움을 극복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사안이며 나아가 국가 발전의 장래가 달려있는 지극히 중요한 과제이다. 따라서 현 정부는 심각한 경제위기의 원인이 금융실명제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과 금융실명제의 중요성을 국민들에게 적극적으로 홍보하여 금융실명제의 근본을 확고히 유지해야 할 것이다.<정영헌 조세연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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