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략 15~20년전만 해도 여름철 청량리역에 가면 대학생들을 늘 만날 수 있었다. 배낭과 텐트, 그리고 기타. 청량리에서 기차를 타고 여행을 떠나려는 대학생들의 모습은 청춘의 자유와 낭만을 상징했다. 물론 그들도 기차가 아닌 버스를 타고 여행지에 도착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덜컹거리는 기차간에 앉아 홍익회 아저씨가 파는 삶은 달걀과 사이다를 마시며 여행하지 않으면 멋이 없는 것으로 통했다. 여행길이 지겨우면 기타를 튕기며 노래도 불렀다. 이제 40줄로 접어들어 아빠ㆍ엄마가 된 그때의 대학생들은 이젠 좀처럼 기차 여행을 하지 않는다. 요즘 같은 휴가철이면 아이들을 승용차에 태우고 막히는 도로에서 시간을 죽이고 있을 것이며, 아예 비행기를 타고 해외로 나간 이들도 많을 것이다. 경제적으로 성공한 사람이라면 골프채를 들고 해외 리조트에 나가 휴식을 취하고 있을 지도 모른다. 어쨌든 한때는 분명 철도가 가장 대표적인 장거리 운송 수단이었다. 그러나 자동차가 대중화 되고 전국의 도로 사정이 좋아진 이후 철도 여행은 점점 빛을 잃어갔다. 그리고 KTX가 개통한 뒤로는 새마을ㆍ통일ㆍ무궁화호를 타는 손님이 급격히 줄어들었다. 하지만 최근들어 인기가 시들해진 철도 여행이 다시금 관심의 대상이 되고 있다. 정동진으로 해맞이를 가는 테마 열차가 잠자고 있던 기차 여행의 낭만을 일깨운 신호탄이었다. 요즘은 한국철도공사(KORAIL)가 새로운 시대의 요구에 부응하는 각종 테마열차와 특별열차를 운행하며 특별한 기차 여행의 낭만을 새롭게 하고 있다. 지난 겨울 강원도 정선 역으로 스키어들을 실어 나른 ‘스키열차’와 올 여름 동해 바다로 향한 ‘바다열차’, 식당칸에서 다양한 와인을 즐기며 포도로 유명한 충북 영동을 여행할 수 있게 한 ‘와인열차’가 대표적이다. 지난해 전국의 몇몇 간이역들이 문화재로 지정되면서부터는 역사 속으로 사라져가는 간이역만 골라서 여행하는 젊은이들도 늘고 있다. 특히 여행 동호회나 사진 동호회의 간이역 방문이 활발하다. 몇몇 간이역들은 승객 감소와 전철화에 따라 조만간 여객 업무를 종료할 예정이라 아직은 기차가 다니는 간이역의 정취를 맛보려는 사람들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 아무리 도로가 막히는 휴가철이지만 철도를 이용한 여행은 승용차를 이용하는 것보다 불편하다. KTX가 서는 여행지가 아니라면 철도 여행은 어느 정도 불편을 감수해야 한다. 그러나 끝없이 이어진 철길을 달리는 기차 여행은 승용차에는 없는 낭만과 멋을 선사한다. 칙칙폭폭, 덜컹덜컹하는 소음과 빵빵거리는 기적 소리는 추억을 일깨우는 음악이다. 기차를 타야만 느낄 수 있는 여행의 정취와 기차 여행을 위해 유용한 정보들을 모아봤다. 옛 영화 반추하는 孤寂한 간이역
70년된 양평군 구둔역엔 내리고 타는 이 하루 70명
붐비던 승객 줄어들자 驛舍는 문화재로 경기도 양평군 지제면 일신리 구둔역(九屯驛)에서 기차를 타는 사람은 하루 25~30명, 내리는 사람은 35~40명 정도다. 앙평 시내에서 15㎞, 용문산 관광지에서 12㎞ 이상 떨어진 외진 산골. 설마 기차 역이 있을 거라고 상상하기 어려운 곳에 자리잡은 구둔역은 왠지 모를 쓸쓸한 정취를 풍기며 끝없이 이어진 철길 옆에 홀로 서있다. 구둔역은 간이역이다. 24시간 동안 약 90대의 열차가 지나가지만 이 중 무궁화호가 하루 세 번만 선다. 대부분 간이역이 그렇듯 구둔역도 기차표를 팔지 않는다. 여기서 타는 승객은 기차에 올라타서 승무원에게 표를 구입해야 한다. 이 곳에서 근무하는 역무원은 모두 6명. 2명씩 조를 이뤄 주간ㆍ야간ㆍ휴식의 3교대로 근무를 한다. 이경곤(48) 구둔역 역무과장은 이 역에서 양평 시내와 원주 시내의 고등학교로 통학하는 학생 얼굴을 모두 외우고 있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역에서 기차를 타고 통학하는 학생이라고 해봐야 5명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지금은 사라져가는 간이역에 불과하지만 구둔역은 70년 가까운 역사를 갖고 있다. 일제 강점기인 40년에 보통역으로 영업을 개시했고, 90년대 초까지만 해도 통학생과 출퇴근 승객이 넘쳐 났다. 그러나 이후 이용객이 점점 줄기 시작해 지금과 같은 한산한 역이 됐다. 요즘 구둔역을 주로 찾는 사람들은 여행이나 사진 동호회 회원들이다. 수풀이 우거진 산자락에 홀로 선 간이역, 옛날식 건축 양식 그대로인 113.88㎡의 아담한 역사(驛舍)는 그 자체가 한 편의 역사(歷史)이고 한 폭의 풍경화다. 보는 순간 마치 근대로 돌아간 듯한 느낌을 받는다. 구둔역을 들르는 열차는 오전 7시, 정오, 오후 7시 세 차례 청량리역에서 출발한다. 덜컹커리는 무궁화호를 타고 사라져가는 간이역을 구경하는 맛은 남다르지만 주변에서 즐길 거리는 거의 없다. "미안하지요. 언론에 알려진 이후 구경 오는 분들이 많은데, 주변에 변변히 식사할 곳도 마땅 찮으니…. 동호회 분들은 알아서들 움직이지만 일반인 손님들에겐 양평 시내로 가는 택시를 불러드리곤 합니다. 봄ㆍ가을엔 할머니들이 나물 뜯으러 많이 오세요. 그러면 커피라도 한 잔씩 꼭 대접해 드리곤 하죠. 여긴 사람이 반가운 곳이거든요."(이 역무과장) 구둔역은 문화재다. 지난해 구둔역을 비롯한 전국 21개 간이역과 청량리역 검수차고가 그 역사성과 건축미를 인정 받아 문화재로 정식 등록됐다. 오는 2012년께 구둔역 구간까지 복선 전철화가 완료되면 구둔역은 여객 업무를 마치며, 철도공사에서 문화재청으로 소속이 바뀌게 된다. 문화재로 등록된 간이역 중 가장 오래된 곳은 1914년 영업을 개시한 익산 춘포역이다. 서울에도 문화재 간이역이 있다. 이화여대 쪽에 있는 신촌역과 노원구의 화랑대역이다. 최근에는 간이역만 골라 찾아다니는 여행 동호인들도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 사진 찍기 좋아하는 사람들도 마찬가지로 간이역을 찾아다니곤 한다. 그래서 간이역은 요즘 같은 휴가철이나 주말이면 '이동'을 위한 승객이 아니라 역 자체를 즐기러 온 나그네들로 붐비곤 한다. 서울에서 가장 가까운 교외에 있는 문화재급 간이역은 경기도 남양주시 와부읍 팔당리에 있는 팔당역(八堂驛)이다. 팔당역은 규모로만 보면 역사(驛舍)라기 보다는 오두막에 가깝다. 역사 건축면적이 56.99㎡에 불과하다. 상ㆍ하행선 철로 가운데 역사가 자리한 것도 특이한 점이다. 팔당역은 길거리에서는 잘 보이지 않지만, 누구나 대충 떠올릴 수 있는 곳에 있다. 양평대교를 남에서 북쪽으로 건널 때 오른편에 보이는 쌍용양회 시멘트 저장소 바로 아래가 양평역이다. 강원도 쌍용역에서 실어온 시멘트 열차 100대 이상이 이곳에서 화물을 내려놓는다. 대신 승객은 하루 10명 정도가 하루 한 번 정차하는 무궁화호에서 내리고 탄다. 이 역에서 조장으로 일하는 김진호(46) 씨는 지난 80년대 초반 3년간 팔당역에서 일하다 최근에 다시 이곳으로 발령이 나 근무 중이다. 김 씨도 옛날 얘기를 빼놓을 수 없었는지 한 마디 했다. "당시엔 대단했지. 주말엔 팔당 유원지 가는 관광객이 수백명 씩 타고 내렸어. 사람이 많을 땐 창문으로 사람을 태우기도 했으니까. 지금이야 다 자동차 타고 팔당 근처로 놀러 다니지만 말야. 그야말로 격세지감이 느껴지는 얘기지." 팔당역엔 올 12월 전철이 개통된다. 여객 기능은 모두 새로 지은 역사로 옮긴다. 그러나 시멘트 화물 업무는 간이역에서 계속될 예정이다. 팔당역은 경치가 빼어난 곳으로 유명하다. 하남과 팔당 사이를 흐르는 넓은 한강이 내려다보이는 경치는 옛 건물의 정취를 더욱 드라마틱하게 만든다. 근처에 식당 등 편의시설도 충분하다. 현재 문화재로 등록된 간이역은 언젠가는 모두 기차가 서지 않는 유물로만 보존될 것이다. 기차는 늘 떠나지만 역은 언제나 뒤에 남는다. 역이 지닌 쓸쓸한 정취는 본질은 보내는 자의 외로움. 그래서 간이역도 기차가 다닐 때 구경해둬야 제대로 된 정취를 맛볼 수 있다.
<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