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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는 전세계 국내총생산(GDP)의 약 60%에 달하는 45개 국가와 8개의 자유무역협정(FTA)을 체결한 통상 대국이다. 여기에 세계 최대 국제기구인 유엔의 사무총장이 한국인이고 세계은행(WB) 총재는 한국계 미국인을 배출했다. 최근에는 환경 분야 최대 국제금융기구인 녹색기후기금(GCF)을 인천 송도에 유치하는 성과도 거뒀다.
이처럼 외형적으로는 화려해졌지만 안타깝게도 우리의 경제외교력은 아직 존재감이 미미하다. 각종 국제금융기구에서 우리나라의 지분율은 1~2%에 그쳤고 투표권 비중도 세계 20위권 안팎에 불과하다. 경제규모는 세계 10위권이지만 국제사회 영향력은 그에 한참 못 미치고 무역은 미국ㆍ중국 등 특정시장에 편중돼 있어 경기침체의 바람을 많이 탄다.
우리의 경제 외교력을 키우고 수출시장을 다변화하는 일은 박근혜 대통령 당선인이 이끌 차기 정부의 핵심 과제다. 이는 대선의 최대 화두였던 경제민주화나 복지보다도 중요한 문제일 수 있다. 자원빈국인 우리나라는 세계 시장에 전적으로 국가의 '생존'을 의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라 밖 영토를 넓혀야 나라 안도 풍요로워진다.
◇ '개발 경험'을 트레이드 마크로 해외 원조 확대=선진국들은 지난 반세기 인도주의를 표방하며 개발도상국 등을 대상으로 각종 원조를 실시했지만 실상은 철저히 자국의 영향력 확대와 경제 과실을 노려왔다.
일례로 미국의 경우 국제무대에서의 주도권 확보를 위해 '군사지원+원조'를 전략적으로 활용한다. 독일은 에너지, 프랑스는 환경, 일본은 교통 등 자국기업 수주가 유리한 분야를 개도국에 전략적으로 원조하는 특징이 있다. 중국은 막대한 자본을 바탕으로 아프리카 자원 부국들에 돈을 뿌리고 있다.
우리의 국제사회 원조는 아직 걸음마 수준이다. 2010년이 돼서야 경제협력기구(OECD) 산하 개발원조위원회(DAC)에 가입했고 본격적인 공적개발원조(ODA) 공여국 반열에 올랐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선진국에 비해 무역 의존도가 크고 수출시장을 개도국으로 넓혀가야 하기 때문에 원조 정책을 지금보다 적극적으로 활용해야 한다는 지적이 많다. 수출입은행의 한 관계자는 "원조확대는 개도국과의 무역마찰 방지 및 신흥시장 관리 차원에서 효과적인 방법"이라고 전했다.
특히 식민지와 내전을 거치면서 원조를 받던 우리나라는 원조를 주는 국가로 전환한 전세계 최초의 사례라는 자부심이 있다. 비록 ODA 재원 규모는 크지 않지만 '개발경험'을 우리의 트레이드마크로 살리면 개도국 원조에서 여느 선진국보다 강점을 가질 수 있는 것이다.
전문가들은 차기 정부의 ODA가 앞으로 개도국의 성장을 유도하는 개발 금융에 보다 초점을 맞추고 원조의 개념도 지금보다 크게 확대해야 한다고 지적하고 있다. 정혁 KDI국제정책대학원 교수는 "ODA를 지렛대로 삼아 개도국과 경제협력을 전반적으로 확대하는 혁신적인 개발 협력 모델을 발굴할 필요가 있다"며 "이를 위해서는 유상과 무상으로 획일적으로 나눠져 있는 국내 ODA를 전문성에 따라 다시 역할 분담하는 등 체계적인 ODA 틀을 잡아야 한다"고 말했다.
◇동아시아 FTA 시장에서 주도권 가져야=우리나라는 그동안 다양한 국가와 FTA를 체결하며 경제 영토를 넓혀왔다. 그 중에서 한미 FTA와 한ㆍEU FTA는 세계 경기침체 속에서 우리의 수출 전선을 지켜준 일등 공신으로 꼽힌다.
이제 박 당선인이 이끌 차기 정부는 또다시 중요한 도전에 직면해 있다. 열강의 패권 다툼이 본격화된 동아시아 FTA 시장에서 주도권을 획득하는 것이다. 이 지역은 우리가 선진국으로 도약할 수 있는 발판이 될 수 있는 시장이다.
현재 동아시아에서는 미국이 주도하는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 아세안이 주도하는 역내 포괄적 경제동반자협정(RCEP), 한중일 FTA 등이 복잡하게 얽혀 추진되고 있다. 미국은 동아시아에서의 영향력 확대를 노리고 중국은 그런 미국을 경계하며 동아시아 맹주로 자리잡으려 한다.
더욱이 미국을 비롯해 한중일 3국의 지도자도 모두 바뀐다. 이에 따라 각국은 다시 본격적인 통상 전쟁을 시작할 것으로 예상된다. 여느 때보다 발 빠른 대응과 주도권 확보가 필요한 시기다. 더구나 우리나라는 내년 한중일 FTA 협상의 간사 국가이며 1차 협상도 서울에서 개최된다.
한중일 FTA는 현재 일본의 우경화로 중ㆍ일 간의 갈등이 첨예해지면서 한국의 역할론이 부각되고 있다. 방호경 대외경제정책연구원 전문연구원은 "경제 외적 상황으로 한중일 FTA 협상이 난항을 겪을 것으로 예상되는 만큼 한국 정부가 중재자로 나서 중국과 일본을 설득하고 협상의 큰 틀을 만들어나가야 한다"고 말했다.
한중일 FTA에서 한국이 주도적인 역할을 하는 것은 RCEP 협상을 위해서도 매우 중요하다. 한중일 FTA와 RCEP를 거의 동시에 추진해야 하는 한중일 3국은 현재 한중일 FTA를 우선적으로 추진함으로써 RCEP에서 선도적 역할을 하겠다는 인식을 공유하고 있다. 결국 한국이 한중일 FTA의 주도권을 쥐게 되면 RCEP에서도 키메이커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방 연구원은 "차기 정부가 동아시아 FTA 전쟁에서 중재자로서 한국의 역할을 바로잡고 실질적으로 한중일, RCEP 협상을 끌어나가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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