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 들어 4조원이 넘는 주식을 팔아치우며 코스피를 박스권에 가뒀던 기관투자가의 빗장이 열릴 조짐을 보이고 있다. 기관은 올 들어 가장 긴 순매도 행진을 이어가고 있지만 강도는 예전만 못하다. 박스권 탈출에 대한 기대감에 지수 상승 때마다 반복됐던 투신권의 환매 압력이 눈에 띄게 낮아졌기 때문이다. 전문가들은 최근 코스피가 외국인의 안정적인 수급과 우호적인 대내외 증시 환경을 바탕으로 가파른 상승세를 타고 있어 이번만큼은 투신권을 중심으로 한 기관의 매도가 장기 박스권 탈출을 가로막기는 힘들 것으로 보고 있다.
21일 코스피지수는 전 거래일보다 0.05%(0.92포인트) 내린 2,018.50포인트에 거래를 마감했다. 외국인과 개인은 각각 1,342억원, 416억원 순매수했지만 기관이 1,702억원 순매도하며 2,020선에 재진입을 막았다. 기관은 이날까지 15거래일 매도 우위를 기록했고 이 기간에 팔아치운 주식만 2조1,737억원어치에 달한다. 기관의 이 같은 순매도 행진은 올 들어 가장 길며 지난해 9월5일부터 10월11일까지 21거래일 연속 순매도 이후 두 번째로 길다. 이 때문에 일각에서는 이달 들어 가파른 상승세를 타고 있는 코스피가 계속된 기관의 매도 공세에 발목이 잡힐 것이라는 우려까지 나오고 있다. 기관이 박스권 탈출을 가로막는 자물쇠가 돼버렸다는 것이다.
시장 전문가들은 기관이 코스피 박스권의 자물쇠 역할을 더 이상 하지 못할 것으로 전망했다. 지수 상승과 함께 기관의 매도 공세가 계속되고 있지만 매도 패턴이 과거와 달라졌다는 것이다.
대표적인 것이 투신권의 높아진 증시 눈높이다. 조병현 동양증권 연구원은 "올 초 같으면 코스피지수가 지금 수준에 도달하기 전부터 투신권을 중심으로 펀드 환매 물량이 쏟아져나왔을 것"이라면서 "하지만 2,010포인트가 넘은 현 구간에서도 펀드 환매 물량은 많지 않다"고 말했다. 펀드 환매 시작 레벨이 연초보다 높아졌다는 얘기다.
동양증권에 따르면 올 들어 첫 펀드환매가 시작됐던 1월 초 코스피지수는 1,950포인트였지만 두 번째 환매물량이 쏟아졌던 1월 중순에는 1,970.42포인트, 세 번째 구간(2월27일)에서는 1,978.43포인트까지 올랐다. 이어 3월 말에는 1,990포인트 중반까지 상승했고 5월 중순에는 2,010포인트까지 올랐다. 이달 들어서는 2,015.28포인트에서 펀드환매가 시작됐다. 김후정 동양증권 연구원은 "이날 투신권이 다소 많은 931억원을 순매도했는데 이는 코스피가 최근 연중 최고치를 갈아치우면서 펀드 가입자의 투자 심리에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면서 "단기적으로 조정이 일어날 수 있겠지만 최근 투신권의 매도 패턴을 볼 때 코스피가 추가 상승하는 데 발목을 잡을 만큼 강한 조정은 이뤄지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주식형 펀드 설정 잔액이 이미 바닥을 쳤고 펀드 투자의 주체인 개인들의 투자심리가 개선되고 있다는 점도 호재다. 동양증권에 따르면 지난 17일 기준 주식형 펀드 설정잔액은 61조246억원으로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최저점인 2011년 1월28일 60조8,000억원과 유사한 수준이다. 조 연구원은 "61조원의 자금 중에서도 추가 유출은 발생할 수 있다"면서도 "글로벌 금융위기 여파에 따른 1차 펀드 환매가 마무리 수준까지 진입했다는 것은 이후에 진입한 자금과 관련된 환매 부담이 거의 사라졌다는 것을 뜻한다"고 말했다. 개인의 투자심리를 보여주는 증권 고객 예탁금도 올 초 13조원대까지 떨어졌다가 이달 들어 15조원 수준을 회복했다.
김학균 KDB대우증권 투자전략팀장은 "지난해 가을 외국인이 공격적으로 국내 주식을 쓸어담았는데도 코스피가 박스권 탈출에 실패했던 것이 바로 투신권의 펀드환매 물량이었다"면서 "하지만 최근에는 강도가 많이 약해져 박스권 탈출의 장애 요소가 되지는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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