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수들이 자주 쓰는 말 가운데 ‘이렇게 될 자리’라는 것이 있다. 어쩔 수 없이 낙착되는 운명 같은 수순을 말함이다. 좌변에서 발생한 패의 귀결을 검토실의 고수들은 진작부터 훤히 내다보고 있었다. 패는 흑이 이기고 백은 패의 보상을 받아낸다는 것. 보상이 훨씬 커서 백이 유망한 바둑이 된다는 것. 백58은 짜릿짜릿한 급소. 이 공격수를 두기 위해 최철한은 좌변의 패를 감수했던 것이다. 흑에게는 마땅한 팻감이 없으므로 59로 억지 팻감만들기에 나섰다. 최철한은 무조건 다 받아주고 있다. 좌상귀를 큼지막하게 차지하면 좌변의 패는 져도 괜찮다는 판단이다. 점심 시간이 임박한 시각. 사이버오로 검토실에 루이9단과 장주주9단이 가담했다. 오전의 수순을 주욱 복기하던 루이가 말한다. “흐름은 백이 좋은데 확실하지가 않아요. 패를 낼 필요가 없었던 것 같아요.” 제2회 잉창치배 대회때 준결승까지 진출한 바 있는 루이. 당시의 우승자는 바로 서봉수9단. 백도 팻감이 없으므로 68로 전향했다. “못 받겠지요?” 서봉수가 묻자 루이가 끄덕끄덕. “팻감만 있으면 흑이 고개를 바짝 쳐들 수도 있는 문제인데….” 이렇게 말하며 서봉수가 참고도의 흑1을 판 위에 그려놓았다. “이게 바로 사두(蛇頭)라는 건데….” 루이가 깔깔 웃으며 대꾸한다. “뱀 머리만 내밀고 몸뚱이가 죽겠네요.” 역시 참고도는 흑의 무리라는 얘기였다. (54, 64…51의 오른쪽. 57, 67…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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