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까지 최고 결정권자인 대통령이 규제 개혁에 대한 의지가 있어도 실제 집행기관인 지방자치단체의 실무진까지 전파되지 못하거나 국회에서 법안으로 이어지지 못한 경우가 대부분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번 규제는 암 덩어리라는 이야기가 나올 정도로 범정부 차원에서 규제 개혁이 추진되고 있는 만큼 기업이 거는 기대가 어느 때보다 큽니다."
전국경제인연합회의 한 관계자는 20일 청와대에서 박근혜 대통령 주재로 열리는 '규제개혁장관회의 겸 민관 합동 규제개혁 점검회의'에 대한 재계의 기대감을 이같이 설명했다.
역대 정부마다 규제 개혁을 외치지 않은 적이 없었지만 실제로는 해마다 규제가 늘어나며 헛구호에 그친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박 대통령이 직접 나서 규제를 '암 덩어리' '쳐부술 원수' 등에 비유하며 강도 높은 규제 개혁을 예고한 만큼 이번에는 예전과 다를 것이라는 기대가 크다.
특히 글로벌 경기 침체 지속과 중국 등 신흥국 기업의 맹추격, 주력 산업의 성장 정체 등에 직면한 국내 기업에 규제 개혁은 사활이 걸린 문제이기도 하다.
그러나 현실은 기업이 각종 규제에 가로막혀 시설 확장 등 투자와 신사업 진출에 발목이 잡혀 있는 상황이다. 정부가 규제 완화를 약속해도 지방자치단체의 반대에 부딪혀 접어야 했던 프로젝트도 수두룩하다.
기업은 이 같은 규제를 과감히 풀어 기업의 신규 투자를 유도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18일 관련 업계에 따르면 전자업체인 A사는 현재 연구소가 위치한 부지가 자연녹지 용도로 규정돼 있어 시설을 증축하거나 리모델링을 하는 게 사실상 불가능한 상태다. 이 회사는 연구공간 부족과 시설 노후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정부 및 지방자치단체에 부지 용도 변경을 지속적으로 요청했으나 건의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하지만 연구소 주변은 이미 아파트 등 주거시설로 개발된 상황이다. A사의 한 관계자는 "정부가 지역 발전 및 일자리 창출을 위해 민간 투자를 지속적으로 종용하고 있지만 부지용도 규제 때문에 이미 보유한 연구소 시설조차 증축 및 개선할 수 없는 환경에서 기업 투자가 과연 활성화될 수 있을지 의문"이라고 아쉬움을 나타냈다.
기업의 공장 및 시설 증설을 가로막는 규제는 곳곳에 산재해 있다.
여수산업단지에 입주한 석유화학업체들은 녹지 규제로 공장 증설 비용을 추가적으로 부담해야 하는 상황에 놓여 있다. 환경부 규제에 따라 해당 부지를 녹지규제 대상에서 제외해 공장설비를 지으려면 해당 부지만큼(약 10만평)의 부지를 정부에 기부해야 한다. 하지만 이렇게 되면 초기 투자비용이 너무 커져 기업 입장에서는 선뜻 투자할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다. 또 공장을 짓기 위해 녹지를 평지로 조성하면 개발이익환수제에 따라 시세 차익의 50%를 정부에 내야 하는 상황이다.
대한항공은 정부와 지자체의 의견 불일치로 6년째 대규모 호텔 및 복합문화시설 건립에 착수조차 못 하고 있다. 대한항공은 호텔을 포함하는 복합문화시설 건립을 위해 2008년 2,900억원을 들여 서울 송현동의 부지를 매입했지만 학교보건법에 막혀 투자를 하지 못하고 있다. 학교 주변에 숙박시설을 지을 수 없다는 규정 때문이다. 정부가 관련 법 개정을 추진하며 투자가 급물살을 타는가 했지만 서울시의 반대로 여전히 사업 자체가 멈춘 상태다. 대한항공이 1조원을 투자해 호텔을 지을 예정인 미국 LA의 경우 시장이 직접 공사 기념행사 현장에 나와 축하하는 등 국내 상황과 대조를 이뤘다.
현대자동차그룹이 서울 성수동 뚝섬 옛 삼표터미널 부지에 2조원을 투자해 추진하려던 110층 규모의 글로벌 비즈니스센터 건설 프로젝트도 잠정 중단됐다. 이 프로젝트는 오세훈 전 서울시장이 국토해양부(현 국토교통부)에 요청해 용도지역을 변경할 수 있도록 법적 기반을 닦았고 용도 변경의 조건으로 기부채납 비율을 48%까지 끌어 올리기로 하는 등 공공성 논란도 어느 정도 해소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하지만 2011년 박원순 시장이 새로 취임하면서 분위기가 돌연 바뀌었다. 서울시는 2012년 '초고층 건축관리 기준'을 마련해 50층·200m 이상 초고층빌딩은 도심과 부도심에만 지을 수 있도록 못 박았다. 도심·부도심 지역이 아니라 공장터였던 뚝섬 부지에는 이 규정에 따라 초고층 빌딩을 지을 수 없게 된 것이다.
지나친 규제로 잘못도 없는 기업이 손해를 보는 경우도 발생하고 있다.
SK에너지는 2008년 기름 도둑이 송유관을 파손하는 사건이 발생해 토양조사비와 토양복구비·시설복구비 등 전액을 부담해야 했다. 토양환경보전법에 따라 가해자가 아닌 시설 운영자가 토양복구비 등을 부담해야 했기 때문이다.
재계는 정부가 이번 회의를 계기로 규제개혁의 양보다는 질적 개선에 주력해야 한다고 주문하고 있다.
전국경제인연합회의 한 관계자는 "'총 규제 몇 건 중 몇 건을 없앴다'는 식의 양적 접근으로는 실제 기업 투자를 이끌어내는 데 어려움이 있다"며 "여러 개의 규제를 없애도 핵심규제 한두 건이 남으면 결국 투자를 할 수 없게 되는 만큼 이번에는 양적 규제 해소보다는 실제 일이 이뤄지도록 질적인 개선에 초점을 두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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