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 많은 토끼를 한꺼번에 잡으려 한다."
국내 전력수급 문제와 관련해 전문가들이 내놓는 한결같은 진단이다. 싼 전기요금, 안전한 원자력발전소, 안정적인 전기공급, 이산화탄소(CO2) 없는 발전소, 내 눈앞에는 안 보이는 전력설비까지…. 실제 국내 전력시장은 도저히 함께할 수 없는 목표들을 한꺼번에 좇고 있다.
모든 이해관계 집단의 입맛에 맞추기 위해 아무것도 포기하지 않는 현재 구조로는 전력난 해결이 불가능하다는 게 전문가들의 공통된 지적. 서울경제신문이 국내 전력 문제와 관련된 대표적 전문가 15인을 인터뷰한 결과 박근혜 정부 임기 내 획기적인 전력정책 변화가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높았다.
◇땜질식 전력정책 탈피해야=전문가들은 우리나라 전력산업의 가장 큰 문제점 중 하나로 땜질식 전력정책을 꼽았다. 전력산업에 대한 분명한 방향성을 제시하지 않고 그때그때 위기만 벗어나려 하는 정부의 '폭탄 돌리기'식 태도가 전력 문제의 구조적인 해법도출을 방해하고 있다는 것이다.
김창섭 가천대 에너지IT학과 교수는 "전기요금 등에 관한 정부 차원의 확실한 시그널을 시장에 제시해줘야 한다"며 "중장기 과제라 할지라도 적어도 방향성은 명확히 제시해야 하는데 정부가 그런 얘기를 못하고 있다"고 말했다. 박종근 서울대 전기공학부 교수도 "정권 초에 태스크포스를 만들어 전반적인 구조를 들여다보고 우선순위를 찾아 국회와 협의하고 문제점을 알리는 게 중요하다"며 "이명박 정부가 정권 말에야 휘발유 가격 문제를 풀려 했지만 결국 못 잡았다"고 지적했다.
◇요금인상ㆍ탄력요금ㆍ세제개편=과도한 전기수요 증가를 억제하기 위해 전기요금 인상 또는 현실화가 필요하다는 점에 대해서는 전문가들도 이견은 없었다. 다만 그 방법과 관련해 다양한 의견들이 제시됐다.
박광수 에너지경제연구원 전력정책연구실장은 "현재 전기에 아무런 세금도 부과하지 않고 있는데 에너지 세제개편을 통해 전기에 과세를 해야 한다"고 말했다. 전력위기시 수요를 효과적으로 억제할 수 있는 신규 요금제를 도입할 필요성도 제시됐다. 김영산 한양대 경제학부 교수는 "공급이 긴급하게 부족할 때 정부의 명령이나 통제 말고는 제어수단이 없다"며 "실시간 수요 상황에 직접적으로 반응할 수 있는 동적 요금제 도입을 검토해봐야 한다"고 강조했다.
◇전기 쓰는 산업 줄이고 아끼는 산업 살리고=전기수요를 줄이기 위해 산업구조 개편이 필요하다는 지적도 나왔다. 문승일 서울대 전기공학부 교수는 "우리 산업체에서 쓰는 전기가 일본의 2.5배 수준"이라며 "이런 구조에서는 발전소 공급만 갖고는 문제해결이 안 된다"고 말했다.
문 교수는 이어 "원전 1개를 짓는 것보다 전기를 저장할 수 있는 기술을 개발하는 게 더 중요하다"며 "전기를 펑펑 쓰는 산업보다는 전기를 아끼는 산업이 이제 신성장동력"이라고 지적했다. 고동수 산업연구원 선임연구위원도 "전기가 1차에너지를 통해 생산되는 고급 에너지인데 이것을 아끼겠다는 마음이 없다 보니 세이브 기술도 개발되지 않고 있다"며 "값싼 전기요금이 오히려 산업발전을 저해하는 부분이 있다는 점을 인지해야 한다"고 말했다.
◇송전망 계획 재수립 및 적정 예비율 수준 확대=정부는 2014년이 되면 신고리 3ㆍ4호기 등 신규 원전과 대형 화력발전소들이 가동되면서 전력난이 해소될 것이라고 강조하고 있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송전망 과부하' 등 변수가 너무 많아 전력공급 불안 문제는 이제부터 시작으로 보고 있다.
석광훈 에너지시민연대 정책위원은 "정부 계획대로 발전소를 건설해도 송전망이 그것을 따라가지 못하는 게 현실"이라며 "(발전소와 달리) 송전망은 약간의 문제만 생겨도 광역정전으로 확대될 수 있다"고 지적했다. 조영탁 한밭대 경제학과 교수도 "현재 수도권 송전망이 너무나 불안해 송전망 대책을 시급히 강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현석 에너지정의행동 대표는 "정부의 지금까지 전력정책은 발전소 공급 확대 위주였지만 결국 수요를 못 따라가는 상황이 도래했다"며 "계속 수요가 늘어나면 발전소를 아무리 지어도 또 문제가 생길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경쟁ㆍ지능형 판매 시스템 도입=국내 전력산업 구조에 대해서도 근본적인 수술 방향을 다시 논의해봐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우리 전력산업은 발전 부문에서만 경쟁체제가 도입돼 있고 송전ㆍ배전ㆍ판매는 한국전력이 독점하고 있다. 정부의 획일적인 전기요금 규제와 이에 따른 부작용은 이 같은 구조에서 비롯된다.
정부는 지난 1990년대부터 단계적 민영화를 목표로 전력산업 구조개편을 추진했지만 1단계 계획(발전회사 분할) 이행 이후 구조개편을 중단한 상태다. 당시 추진과제였던 판매 민영화에 대해서는 여전히 논란이 뜨겁다. 손양훈 인천대 경제학과 교수는 "전력산업이 정부의 명령이나 컨트롤이 아니라 견제와 경쟁으로 가는 것이 맞다고 본다"며 "그러기 위해서는 기본적으로 판매 부문에서도 경쟁을 도입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그러나 급속한 민영화보다는 공기업 중심의 단계적인 판매경쟁 도입을 대안으로 제시했다. 고 연구위원은 "발전회사들이 판매를 겸업하게 하는 방식 등 다양한 대안을 생각해볼 수 있다"며 "민영화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경쟁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전력난 해법에 도움주신 분들=손양훈 인천대 경제학부 교수, 이승훈 서울대 경제학과 명예교수, 박광수 에너지경제연구원 전력정책연구실장, 박종근 서울대 전기공학부 교수, 문승일 서울대 전기공학부 교수, 김영산 한양대 경제금융학부 교수, 허은녕 서울대 에너지자원공학과 교수, 김대욱 숭실대 경제학과 교수, 이진우 에너지기후정책연구소 부소장, 강희찬 삼성경제연구소 수석연구원, 석광훈 에너지시민연대 정책위원, 이현석 에너지정의행동 대표, 조영탁 한밭대 경제학과 교수, 김창섭 가천대 에너지IT학과 교수, 고동수 산업연구원 선임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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