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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기를 보내며-20세기 20선] 6. 재계사건
입력1999-12-19 00:00:00
수정
1999.12.19 00:00:00
◇재벌 등장(50년대)일제시대를 지나 해방과 6·25전쟁을 거치며 주한미군사령부를 중심으로 추진된 전후복구사업과 적산기업 불하, 원조물자 배정, 군납사업 등을 배경삼아 재벌들이 속속 등장했다.태창, 삼성, 삼호, 개풍, 대한산업, 동양, 한국생사 등이 당시에 출현했던 대표적인 재벌들로 당시 이들은 고유의 생산활동보다 정부 또는 미군정을 대상으로 펼치는 로비활동에 주력했다. 재벌의 등장은 이에 앞서 삼양과 화신을 첫 시작으로 잡을 수 있지만 재벌시대는 50년대이후 본격 시작됐다.
◇국산 라디오 첫 생산(59년 11월)
국내 최초 진공관 라디오가 금성사에 의해 만들어졌다. 국산 라디오생산은 사실상 한국 전자산업의 효시. 당시 최고의 제품은 미국산 제니스 라디오였으나 서민들은 감히 구경하기도 힘들 정도였다. 진공관, 스피커, 레지스터, 더스트 코아, 볼륨컨트롤 등 주요 부품을 수입해 생산된 국산라디오 생산은 이후 66년 흑백TV, 68년 에어컨, 79년 컬러TV 국산화로 이어지면서 한국전자산업의 지평을 열어갔다.
◇사카린밀수사건(66년 9월)
한비가 사카린원료를 수입 밀가루로 포장해 몰래 들여오려다 적발되면서 불거졌다. 당시 사카린은 식용다이아몬드라고 불릴 정도로 고가품. 넘치는 수요에 비해 공급은 턱없이 부족해 한비가 이를 몰래 들여왔다. 이 사건 여파로 이병철 당시 삼성회장은 경영은퇴를 선언하는 등 사회, 경제적 파장을 불러일으켰으며 이후 기업의 윤리의식에 대한 경종을 울렸던 대표적인 사건이다.
◇전경련 창립(68년 3월)
5·16이후 경제계의 위축된 위상을 되살리기 위해 61년 8월 주요 기업인 13명으로 구성된 「한국경제협의회」가 모태가 돼 68년 3월 제17회 임시총회를 거쳐 전국경제인연합회가 탄생했다. 전경련은 이후 재계의 이해를 대표하고 재벌들의 논리를 뒷받침해 주는 이익집단이라는 비판을 받아왔으나 김우중회장의 사퇴이후 재벌 중심에서의 탈피를 모색하고 있다.
◇경부고속도로 개통(70년 7월)
68년 2월 1일 기공해 2년5개월만인 70년 7월 7일 준공한 서울-부산간 고속도로 개통은 우리나라를 일일 경제권역으로 재편시켰다. 총연장 428KM의 4차선으로 개통된 경부고속도로는 이후 수출 한국의 산업 대동맥으로서 수도권과 영남공업지역, 인천-부산을 잇는 2대 수출입항을 연결시켜 기존의 철도, 국도와의 중복을 피하면서 산업발전에 가속도를 불어넣었다.
◇1, 2차오일쇼크(73년, 80년)
제4차 중동전쟁을 계기로 아랍권 산유국들에 의해 행사된 석유무기화 정책으로 우리나라는 극심한 에너지파동을 겪어야 했다. 이보다 앞서 미국이 농산물 및 고철 등 원자재 수출을 제한했으며 일본 등은 원면, 생고무, 고철, 동 등 천연자원을 매점매석해 국제적인 자원파동으로 이어져 우리나라에 2중의 충격을 주었다. 이 여파로 우리나라는 친(親)이스라엘 정책에서 친(親)중동정책으로 전환했으며 석유에너지 확보를 위한 방안마련에 고심했다. 1차 오일쇼크이후 7년이 지난 80년에도 중동 산유국들의 석유감축으로 전세계적인 오일쇼크가 발생했다.
◇중동건설 붐(76년)
현대건설이 사우디아라비아의 주배일 항만공사 수주를 시작으로 펼쳐진 중동건설 붐은 당시 막대한 오일머니를 바탕으로 한 중동지역을 발판으로 한강의 기적을 이뤄내는 기폭제가 됐다. 동아건설이 건설한 리비아 대수로공사는 만리장성에 버금가는 역사적인 사업이라는 평가를 받았으며 동아는 1~3단계 수로 공사를 모두 수주하는 기염을 토했다.
◇수출 100억달러 달성(77년)
60년대들어 수출입국의 기치아래 해외시장 개척을 지속한 끝에 한해 수출 규모가 처음으로 100억달러를 넘어섰다. 62년 수출실적 5,600만달러를 시작으로 무려 200배나 늘어나는 등 연 평균 42.4%의 놀라운 신장률을 보이면서 한강의 기적을 이끌어 냈다. 이후 수출 한국은 더더욱 가속도를 높여 세계 10위 안에 들어가는 무역대국으로 성장했다.
◇율산그룹 파산(79년)
「청년실업가 신화」라는 부러움과 두려움을 받으며 설립 4년 만에 한국의 정상급 재벌로 떠올랐던 율산이 파산했다.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기업인수, 부동산투기 등으로 운영자금이 고갈되면서 결국 신화가 허상으로 드러난 율산파문으로 그동안 율산을 지원했던 서울신탁은행장이 배임협의로 구속되고 11개 은행장들이 무더기 인사이동하는 금융 대격변을 불러일으켰다.
◇최초 해외생산공장 설립(81년)
국내 기업이 해외에 생산 거점을 마련, 글로벌 경영의 첫장을 열었다. 금성사는 81년 미국 엘라베머주 헌츠빌시에 50만달러를 자본금으로 한 컬러TV 전용의 GSAI(GOLD STAR OF AMERICA INC)를 설립했다. 이제 막 컬러TV 생산에 나선 금성사의 해외 생산법인 설립은 국내외 비상한 관심을 불러일으켰으며 이후 국내기업들의 해외 생산거점 확보 붐으로 이어졌다.
◇정주영 현대회장 대선출마(92년)
재벌이 정치권력에 도전하는 첫 사례가 나타났다. 정주영 현대명예회장은 현대계열사를 중심으로 국민당을 창당하고 92년 대선에 출마해 전국적인 돌풍을 일으켰다. 아파트 반값 공급, 경부고속도로 복층 건설 등 깜짝놀랄만한 공약을 내걸며 서민층을 공략했으나 낙선했다. 정회장의 대선출마는 그동안 정치권에 철저하게 예속됐던 재계의 목소리를 높이는 시발점으로 작용했다.
◇256메가D램 반도체 세계 첫 개발(94년)
삼성전자가 세계에서 가장 먼저 256메가D램 반도체를 개발하는 쾌거를 이뤘다. 이는 영원한 후발주자로 남아있을 것 같았던 한국 반도체 산업을 세계 정상에 우뚝 솟게해준 것으로 이후 반도체가 한국 수출의 1등 공신으로 자리매김하는데 상징적인 의미를 갖고있다. 한국은 이후 1기가급D램, 램버스D램 등을 잇달아 세계 최초로 개발하는등 기술력 확충에 가속도가 붙었다.
◇삼성 자동차 산업 진출 및 실패(94년 12월)
삼성이 신수종 사업이란 이름 아래 부산에 자동차 공장을 마련한다는 계획을 세웠다. 지역 이기주의와 정치권, 산업계의 야합이라는 눈총을 받으면서도 「삼성이 만들면 다릅니다」라는 캐치프레이즈를 내걸고 2개의 자동차 모델을 개발했으나 막대한 자금부담, 해외시장 개척의 한계가 겹친데다 국가 외환위기 속에 시장 진출 4년만에 중도하차하고 말았다.
◇CDMA 세계 첫 상용화(96년 4월)
세계 최초로 CDMA방식의 이동전화 상용 서비스에 성공함으로써 우리나라는 본격적으로 디지털 이동통신 시대에 들어섰다. CDMA 이동전화의 상용화는 아날로그 전화보다 훨씬 뚜렷한 음질, 높은 통화성공률 등으로 이동전화의 「질」을 획기적으로 올렸다.
◇한보·기아그룹 부도(97년1월, 7월)
외환위기로 대표되는 97년은 시작부터 한보그룹 부도라는 초대형 악재로 출발했다. 정치권과 결탁한 금융특해 스캔들로 확산된 한보 부도는 당시 「소산」으로 불리던 김영삼 대통령의 차남 현철씨를 구속으로 몰고갔다. 곧 이어 7월에 기아그룹마저 과도한 부채와 부실경영으로 쓰러지면서 국제 금융기관들의 한국 이탈을 유발시켰다.
◇PCS 상용서비스 개시(97년 9월)
유선통신시대에서 무선통신 시대를 여는 개인휴대통신 서비스가 개시됐다. PCS 시대가 열리면서 이동전화는 사치품에서 2명중 1명이 이용하는 대중상품으로 바뀌었다. 최근에는 PCS폰을 이용한 인터넷, 주식거래 서비스 등 다양한 부가 서비스가 생겨나고 있다.
◇재계 빅딜(98년 9월)
김대중 대통령의 주도 아래 재벌 개혁이 시작되면서 반도체, 철도차량, 유화, 항공, 자동차, 발전설비 등 7개업종에 대한 대규모 사업교환(빅딜)이 시작됐다. 이 결과 현대전자와 LG반도체가 대통합을 이뤄냈으며 대우자동차와 삼성자동차가 통합 결의를 갖는 등 산업 전반에 걸친 지각변동이 시작됐다. 하지만 빅딜 이후의 주도권 문제, 어느 기업으로 통합되는냐는 이해, 고용조정 문제 등이 복합적으로 어울어지면서 지루한 실갱이와 갈등이 이어졌다.
◇금강산 개발 사업(98년 11월)
분단 53년만에 민간인의 북한 방문이 공식적으로 이뤄지는 금강산개발사업이 시작됐다. 북한의 주요 군사요충지인 장전항이 관광객 수용을 위해 개방됐으며 정주영 현대 명예회장이 소떼를 몰고 판문점을 통과해 북한으로 들어가는 등 통일의 분위기를 완연하게 끌어올렸다. 이후 남북 경협사업은 현대 독주체제로 이어져 여타 기업들의 대북 경협사업이 상대적으로 시들해지는 부작용도 만만치 않았다.
◇대우그룹 해체(99년)
「대마 불사」라는 재계의 오랜 격언이 무색해졌다. 외형 기준으로 재계 2위인 대우그룹이 막대한 부채와 오랜 기간 누적된 부실의 부담으로 결국 그룹 해체라는 비운을 맞게됐다. 세계 경영이란 기치아래 동구권, 중남미 등 이머징마켓을 집중적으로 공략했던 대우의 위기로 한 때 제2의 세계 금융시장 위기론이 대두될 정도의 파괴력을 나타냈다.
◇인터넷 붐, 벤처기업 창업 열기(99년)
90년대 중반부터 국내에 불기 시작한 인터넷 붐은 99년 대폭발을 일으키며 「정보화 혁명」을 주도했다. 인터넷은 금융, 산업, 통신, 문화, 정치 등 사회 모든 분야를 뒤흔들었다. 인터넷 사업의 성공으로 수백억원의 돈을 거머쥔 인터넷 스타가 탄생하는가 하면 코스닥에서 인터넷 주가가 급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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