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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데보라 카를 스크린에서 처음 본 것은 중학생 때 어머니와 함께 서울 을지로에 있던 국도극장에서 관람한 '쿼바디스'에서였다. 네로는 기독교 신자인 카를 원형경기장 한가운데 세운 말뚝에 묶어놓고 검은 황소를 풀어놓았다. 소매 없는 하얀 망사 옷을 입고 머리에 화관을 쓴 창백하게 아름다운 카가 공포에 떠는 모습이 참 예뻤다. 그 때도 느꼈었지만 난 지금도 카를 보면 냉기가 감돌곤 한다. 그녀는 명장이 만든 미녀 대리석상이 살아난 것 같은 분위기를 지닌 여자다. 이런 느낌은 그녀가 영국(스카틀랜드 태생) 여자여서 더한 것이 아닐까. 지난달 16일 카가 영국의 서포크에서 86세로 사망했다. 뉴스를 접하면서 나는 "이제 '지상에서 영원으로'에 나온 배우 중 남은 사람은 90세인 어네스트 보그나인 밖에 없구나" 하고 아쉬워했다. 이 영화는 그때까지 요조숙녀형으로 고정된 카의 이미지를 완전히 뒤바꾼 작품이다. 하와이에 주둔한 부대 중대장의 아내 카렌으로 나온 카와 남편의 부하인 고참상사 역의 버트 랭카스터와 열연했던 해변 키스신(사진)은 영화사에 길이 남을 로맨틱한 장면이다. 수영복 차림의 두 사람은 사납게 덮쳐대는 파도도 아랑곳하지 않고 서로를 걸어 잠그듯 포옹한 채 뒹굴며 키스를 했다. 그녀는 이 역을 비롯해 생애 모두 여섯 차례 오스카상 후보에 올랐으나 번번이 고배를 마셨다. 아카데미는 1994년 그에게 명예 오스카상을 주었다. 카를 생각하면 금방 떠오르는 또 다른 영화가 율 브린너와 공연한 뮤지컬 '왕과 나'와 케리 그란트와 공연한 '잊지 못할 사랑'이다. 발레ㆍ연극 무대를 거쳐 다재다능해 다양한 역을 맡았던 카가 나온 영화 중 재미 만점의 오락영화는 둘 다 영국인인 스튜어트 그레인저와 공연한 '솔로몬 왕의 보고'와 '풍운의 젠다성'이다. 그러고 보면 카는 수녀 역에 잘 어울리는 배우다. 로버트 미첨과 열연을 펼친 '백사의 결별' 외에도 영국에서 만든 '흑수선'에서도 카는 수녀로 나왔다. 영화는 히말라야 산중에 미션을 설립하려는 수녀의 이야기로 카는 고요하면서도 당당한 위엄을 보여줬다. 카가 마지막으로 오스카상 후보에 오른 영화는 로버트 미첨과 공연한 '선다우너즈'였다. 카는 1969년 엘리아 카잔이 감독한 '어레인지먼트'를 끝으로 사실상 은막을 떠났다. 은퇴하고 싶어 한 것이 아니라 마땅한 배역이 없었기 때문이다. 로렌스 올리비에는 카를 보고 "터무니없이 순결한 여자"라고 평했지만 카는 섹스 심벌과 수녀가 동시에 될 수 있는 여자였다. 우아와 사려 깊음 그리고 투명한 맑음과 강인함을 고루 지녔던 카는 고매한 배우였다.
/한국일보 미주본사 편집위원,할리우드 외신기자협회원 hjpark@korea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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