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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버드대 교수들] "개도국 재벌해체 시기상조"
입력1999-10-11 00:00:00
수정
1999.10.11 00:00:00
신경립 기자
하버드 경영대학원의 타룬 칸나 교수와 크리스나 팔레푸 교수는 하버드 비즈니스 리뷰 최근호에 공동 기고한 「개도국 대기업집단의 올바른 구조조정 방안」이라는 논문에서 개도국 정부는 성급하게 재벌그룹을 해체하기보다는 시장기능이 제대로 발휘될 수 있는 인프라를 구축, 재벌의 자발적인 구조조정을 유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최근 아시아·남미의 금융위기 이후 서구의 금융 전문가들은 한국의 재벌그룹이나 인도의 타타(TATA)그룹 등 개도국의 기업군(BUSINESS GROUP)을 해체해야 한다고 강조해 왔다. 그러나 두 교수는 당장 기업군을 해체해도 민간 경제를 효율적으로 작동시킬 시장제도가 갖춰지기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걸리는데다, 현재 상태에서 무조건 기업군을 해체한다면 민간부문의 비효율이 더 심화될 수 있다는 점에서 이같은 충고가 문제가 있다고 주장했다. 개도국이 시장 제도를 갖추려면 적어도 10년 이상이 걸린다는 것이다.
따라서 정부는 단기적으로 이들 기업군의 내부개혁을 유도하는 한편, 장기적으로는 시장시스템이 원활하게 작동하는 제도를 갖추기 위해 필요한 개혁을 추진해야 한다고 이들은 주장했다. 시장제도만 제대로 갖춰진다면 기업군 해체는 저절로 뒤따라온다는 얘기다.
◇시장 인프라를 건설하라= 시장의 거래비용을 최소화하기 위해선 제도적인 메커니즘이 필요하다. 미국 자본시장에서 투자은행이 자본을 각 사업에 배분하는 매개 역할을 하고, 증권거래위원회가 기업의 대외공시에 신뢰를 부여하고, 경영대학원이 노동시장에 활력을 불어넣듯, 선진 시장에서는 효율적인 매개체와 건전한 규제, 계약의 효력이 경제 성장의 밑거름이 되고 있다.
그러나 개도국이 소프트 인프라를 들여오는데는 상당한 어려움이 따른다. 개도국중에서 가장 효율적인 인프라를 구축한 칠레는 일련의 개혁을 이루는데 25년 이상이 소요됐지만, 아직도 완성됐다고 볼 수 없다.
많은 개도국 정부들은 소프트 인프라의 중요성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 중국이 그렇고, 말레이시아는 정치적 이유때문에 시장 인프라를 발전시키지 못하고 있다.
한국 금융시장의 경우 외국계 투자은행과 컨설팅회사, 회계회사 등의 활동은 늘었지만, 한국 기업들이 주주가치의 개념을 납득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외국 기업들이 시장 매개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지는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기업군이 부가가치를 더 많은 가치를 창출한다= 개도국에서 기업군은 시장제도의 기능을 대신 수행하고 있다. 투자은행과 회계회사, 경영대학원 등의 제도가 정착되지 않은 개도국에선 기업군이 제도 미비에 따른 공백을 메우면서 많은 부가가치를 창출한다.
기업군은 신규 사업을 시작하기 위해 기존 사업의 자본과 경영인력을 이용, 벤처회사와 같은 매개자 역할을 한다. 또 기업군은 노동시장제도의 미흡한 부분을 보완한다. 경영대학원이 부족한 한국의 경우 삼성같은 재벌은 내부 경영자 시장을 창출하고 있다. 기업군은 또 품질과 서비스를 상징하는 브랜드 네임을 통해 가치를 창출한다. 특히 한국같은 수출지향 경제에서는 그 역할이 크다.
이같은 기능을 하는 기업군이 해체될 경우 개도국에는 소프트 인프라를 제공하는 어떤 제도도 남지 않게 될 수 있다. 따라서 재벌해체 전략은 시장 붕괴라는 극단적인 상황을 가져올 수 있다.
◇기업군의 능력 향상이 필요하다= 물론 기업군의 구조조정은 필수적이다. 우선 기업군들은 「우선 성장, 차후 수익성」에서 「우선 수익성, 차후 성장」으로 전략을 수정할 필요가 있다. 이를 위해 내부정보 시스템과 인센티브 시스템 구축 수익성이 낮은 사업의 철수 채무 위주에서 자기자본 위주로의 재무전략 변화가 필요하다.
기업군은 또 서구의 벤처캐피탈 등 소프트 인프라를 제공하는 조직을 모델로 삼아야 한다. 기존 사업에 대한 자금지원은 자본시장에 맡기고 그룹 본부는 벤처자본을 제공하는 역할을 맡아, 위험자본 제공 채용, 교육, 업무순환 프로그램 투자 제품의 질·고객서비스·직업윤리 향상 기업투명성 제고 및 건전한 지배관행 실행 등 벤처캐피탈의 영업원칙을 따를 필요가 있다.
◇정부의 역할은 무엇인가= 위기 이후 한국 정부는 재벌을 위기의 주범으로 비난하고 있다. 그러나 성급한 재벌 해체는 한국의 제도적 공백을 악화시켜 한국기업의 경쟁력을 떨어뜨릴 수 있다.
한국 정부는 칠레의 전례를 따라 제도 건설에만 전력을 다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정부가 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일은 공정하고 강력한 법 제도를 갖춰 소프트 인프라에 스스로 친해질 수 있는 길을 마련하는 것이다.
개도국의 성공 모델이 된 칠레의 경우 70년대 초기만해도 정부가 경제를 지배했지만, 73년 아옌데정부 전복후 금융제도에 초점을 맞춘 일련의 시장개혁이 추진됐다.
칠레 정부는 80년대 국내 연금기금산업을 만들어내는가 하면 내부자거래를 불법화하고 소액주주를 보호하는 법을 도입하는 등 시장 매개체와 건전한 시장 규제를 발달시켜 왔다. 그러나 칠레도 노동시장 제도가 완전히 갖춰지지 않는 등 제도적 공백은 여전한 실정이다.
신경립기자KLSIN@SED.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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