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민간경제연구소들이 워낙 공격적으로 이슈를 던지고 있어요. 저희 같은 국책연구소들이 나태하게 있다가는 설 자리가 없어질 수 있겠다는 위기감이 들 정도입니다."
우리나라의 간판급 국책연구소 고위관계자가 사석에서 한 이야기다. 과거 국책연구소라고 하면 우리 사회의 트렌드를 선도해나간다는 긍지가 따라다녔다. 이제는 판도가 바뀌어 민간연구소들이 우리 사회 '지식의 별'로 떠오르고 있다.
최근 들어 삼성ㆍLGㆍ현대 등 대기업 계열 민간연구소 간 경쟁이 점입가경이다. 하반기 자영업과 중산층 해법을 놓고 벌어진 이슈 경쟁은 싱크탱크들의 총성 없는 전쟁을 여실히 보여준다.
LG경제연구원은 지난 7월 '저부가가치에 몰리는 창업ㆍ자영업 경기 더 악화시킨다'는 보고서를 내놓아 언론의 집중조명을 받았다. 이 보고서는 공급과잉 속에서 위기를 겪고 있는 자영업의 현실과 대책을 촉구하는 시발점 이 됐다.
이후 현대경제연구원이 연이어 이슈를 터뜨리며 이슈를 끌어냈다. 첫 반격은 '중산층 붕괴'라는 문제를 들고 나오면서 시작됐다. 8월 우리 국민의 중산층 의식 약화현상을 지적한 '중산층의 자신감이 무너지고 있다'는 보고서를 낸 것. 일주일 후에는 '에듀푸어'를 테마로 한 보고서로 큰 반향을 일으켰다.
LG연구소는 곧이어 '스트레스테스트를 통해 본 가계부실 위험진단' 등의 보고서로 재반격했다. 삼성경제연구소 역시 이달 들어서만도 중국의 수출감소 문제와 애그플레이션 등 현안 보고서를 줄줄이 내놓으면서 이슈 전쟁에 밀리지 않으려 칼을 갈고 있다.
민간연구소들의 도약은 권위적이고 어려운 주제에만 매달리지 않고 국민들이 체감하고 공감할 수 있는 주제들을 파고든 덕분이다. 연구원들의 피 말리는 노력이 뒷받침됐기에 가능했다. 한때 메이저급 민간경제연구소에 몸 담았다가 공공연구기관으로 자리를 옮긴 한 전직 연구원은 정시 출퇴근하고 여유 있는 업무에 깜짝 놀랐다고 한다. 그는 "민간연구소에 있을 때는 사무실에 밤 늦도록 불이 꺼지지 않는 것이 당연했고 업무가 엄청난데다 고위직이 아니면 개인사무실은 꿈도 못 꿨는데 당시에는 다른 연구소들도 다 그런 줄 알았다"며 치열했던 옛 직장을 회고했다.
물론 민간연구소들이 어젠다를 선점하려 경쟁하다 보면 검증이 덜 된 내용을 선정적으로 발표해 사회현상을 왜곡시킬 수도 있다. 일각에서는 일부 연구소들이 공공기관 등의 연구용역을 따내려 너무 상업적 영업에 치중한다는 쓴 소리도 나온다. 이 같은 민간연구소의 그늘은 국책연구소가 깊이 있고 진중한 연구를 통해 보정해야 할 부분으로 지적된다.
<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