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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톡&스토리] 미두군(米豆軍)의 차익거래

경성주식취인소의 '양건(兩建) 증거금 폐지'를 보도한 1921년 12월18일자 기사.

위문복 하나대투증권 e-Business 지원부 부부장

1928년 7월4일 일본 오사카의 당도미곡취인소(堂島米穀取引所) 미두시세가 하락세를 보이자 부산과 대구의 미곡취인소에서도 대량의 선물 매도 주문이 쏟아졌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조선의 미두시세는 하방경직성을 보였다. 알고 보니 큰손인 인천의 내해(內海)중매점과 경성의 재등(齋藤)정미소가 그만큼의 대량 매수 주문으로 물량을 다 받아냈다. 여기에 인천 태(太)중매점의 '양건적 책동'도 한몫했다.

일제강점기에는 선물을 매수하거나 매도해 미결제약정을 보유한 경우를 건옥(建玉)이라 했으며 전매도나 환매수로 청산하는 것을 해옥(解玉)이라고 했다. 이때 선물의 매수와 매도를 동시에 보유한 경우는 양건적(兩建的) 매매라 했다. 당시 태중매점은 인천미두취인소에 매도 주문을 쏟아낸 반면 동시에 군산미곡취인소에서는 그만큼 매수를 하는 양건적 매매를 해 시장이 버틸 수 있었다. 양건적 매매는 지금의 차익거래와도 같으며 이 용어는 트레이더 사이에서 지금도 사용된다.

두 시장 간의 양건적 매매기법과는 달리 선물 만기가 다른 동종상품의 양건적 매매기법도 사용됐다. 지금의 스프레드거래(spread trading)에 해당하는 것으로 당시 기관투자가에 해당했던 불이흥업주식회사가 주로 활용하던 기법이었다. 불이흥업은 같은 해 8월14일 양건적으로 매수하던 선한(3개월물)을 이식매(이익실현)하는 한편 매도하던 중한(2개월물)은 매도해 두 포지션 사이에서 시세차익을 얻을 수 있었다.



한편 군중소구(群衆小口)라 불리던 미두군들도 차익거래 기법을 활용했다. 그러나 큰손인 태중매점이나 기관투자가인 불이흥업과는 목적이 전혀 달랐다. 1936년 2월18일 미두군들의 선물 포지션에는 양건적 매매가 이익 극대화가 아닌 손실 확대를 막기 위함이었음이 잘 나타나 있다. 미두군들은 근월물인 당한(1개월)과 중한은 매수 포지션이었던 반면 원월물인 선한은 매도 포지션을 취하는 '양건적 매매'를 하고 있었다. 문제는 이미 손실을 보고 있던 대량의 매수 포지션에 비해 뒤늦게 손실을 줄이기 위한 매도 포지션이 극히 적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군중들의 포지션을 파악하고 있던 큰손과 기관투자가는 손절매도를 유도하기 위한 극단적으로 하방 포지션을 늘려갔다. 결국 큰 손실과 적은 이익으로 증거금 부족 사태를 맞은 미두군들은 반대매매를 당했다.

최근 증권선물위원회는 코스피200 선물시장에서 시세 조종을 통해 수백억원의 부당이득을 취한 혐의로 초단타 매매 전문업체를 검찰에 고발하기로 했다. 초당 수백 건 이상의 알고리즘 매매를 통한 자전거래가 문제가 됐다. 100여년 전 조선의 선물시장에도 첨단 금융기법이 존재했다. 1896년 이후 118년을 맞은 한국 선물시장의 역사만큼 그동안 개인투자자의 매매기법이나 위기 관리 능력이 개선됐을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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