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르포] 추석앞둔 유통가 표정<br>경기 호전기미 없자 작년보다 씀씀이 줄여<br>고가제품 외면 10만~30만원대 선호 뚜렷<br>재래시장도 손님 줄어… "명절이 부담돼요"
| 11일 롯데백화점 소공동 본점 식품매장은 추석 선물을 구매하러 나온 소비자들로 붐비는 가운데 저가 상품을 주로 찾는 등 알뜰 구매 경향이 두드러지고 있다. /김동호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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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일 서울 남대문시장은 구경나온 소비자들이 여기저기 눈에 띄었지만 선뜻 구매에 나서는 소비자들은 찾기 힘들 정도로 대목 경기가 썰렁했다. /김동호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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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석을 일주일여 앞둔 지난 10일 서울 소공동 롯데백화점 본점 지하 1층 멸치선물세트 판매장에서 만난 K씨. 조그만 인쇄업체를 운영한다는 K씨는 추석에 선물을 보낼 협력회사 사장들의 이름과 주소가 적힌 종이를 한 손에 들고 선물세트를 고르고 있었다.
점원이 권하는 25만원짜리 세트에 눈길이 가지만 모든 협력업체 사장들에게 다 보내기에는 부담스러운 눈치다. 매대를 둘러보면서 20여분을 고민한 끝에 그는 결국 15만원짜리 멸치선물세트 2개를 구입했다.
K씨는 “선물비용이 부담이 되지만 그렇다고 선물을 안 할 수도 없지 않느냐”면서 “사업상 중요도에 따라 10만, 20만, 30만원짜리로 나눠 구입하고 있다”며 또 다른 선물을 사기 위해 발걸음을 옮겼다.
각종 경기지표가 호전된다는 발표에도 불구하고 추석을 앞둔 일반 서민들의 체감 경기는 아직 이렇다 할 호전 기미가 없다. 추석까지는 일주일가량 남았다지만 본격적인 추석 판촉에 접어든 주말에도 소비자들이 실제 구매를 하기까지 재고 또 재는 모습이 역력했다.
지난해 광우병 파동으로 판매가 급감했던 정육코너는 예년의 활기를 다소 되찾은 모습이었다. 하지만 롯데백화점 본점의 경우 40만~50만원대 상품이 잘 팔리던 예년과는 달리 20만원대의 중저가 상품을 사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으며 20세트 이상 대량 주문하는 고객은 찾아보기 힘들었다.
지방에 계신 부모님께 보낼 정육세트를 구입한 30대 초반의 회사원 L씨는 “지난 설에는 25만원짜리 한우세트를 샀지만 올해는 15만원짜리 ‘알뜰 제수용세트’를 골랐다”며 “부모님께는 죄송하지만 솔직히 추석이나 설 같은 명절이 부담스럽다”고 말했다.
정육선물세트 주문창구 담당자인 김종구씨는 “정육세트로는 중저가인 20만~30만원대 상품이 가장 많이 팔리고 있다”며 “광우병으로 수요가 급감했던 지난해보다는 늘 것으로 예상되지만 건설회사 등 기업들의 대량구매가 크게 줄어 전체 매출이 늘어날지는 의문”이라고 전했다.
비슷한 시간 신세계백화점 강남점은 오후가 되면서 선물세트 판매 접수대에 7~8명 가량의 고객이 꾸준히 자리를 메우고 있었다. 그러나 매장의 체감 경기는 확실히 지난해 추석보다 떨어지는 듯 하다는 게 매장 관계자들의 전언.
강남점 식품팀의 임춘수 판매책임자는 “지난해보다는 확실히 경기가 안 좋다”며 “지난해에는 선물 단가가 40만~50만원대 고가품이 주류를 이뤘다면 올해는 5만~10만원대나 20만원대의 비교적 저가 선물이 잘 나간다”고 말했다.
가공식품 판매 담당자도 “선물을 하긴 하는데 지난해보다 객단가가 30~50%는 줄어든 것 같다”며 “5만~7만원대 선물은 잘 나가는 편”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기업 고객도 20~30%가량 줄고 선물을 하는 기업의 경우도 지난해보다 20~30% 가량 저렴한 선물을 찾는 경향”이라고 덧붙였다.
실제로 선물을 사러 나온 소비자들도 선물 하나를 고르는데 신중에 신중을 기하는 기색이 뚜렷했다. 기업체에서 선물 구매를 위해 백화점에 나온 한 남성은 식품매장을 대여섯 바퀴째 도는 모습. 건강식품 코너에서 서성이는 모습에 판매 직원이 “아직도 결정 못하셨냐”고 묻자 “좀 더 둘러봐야겠다”며 다른 코너로 발길을 돌린다.
한 판매 직원은 “지난해 10만원 하다가 올해는 5만원으로 단가를 낮추면서도 티가 나지 않는 품목을 찾다 보니 많이 망설이다 결정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청과 판매를 담당한 김창훈씨는 “지난해에 사과 두단으로 구성된 10만원대 선물을 하던 손님이 올해는 한단짜리 6만5,000원 상품으로 줄이는 식으로 손님당 구매액도 절반 정도로 줄어들었다”고 하소연했다.
그나마 호조를 띠는 매장은 상품권 판매대. 신세계백화점 강남점의 상품권 판매 코너에는 꾸준히 고객들이 모여들면서 대기인수가 20명 이상을 유지하고 있었다. 상품권 코너 앞에서 차례를 기다리던 한 법인 고객은 “10만원권 100장을 구입할 예정”이라며 “올해는 선물 물량의 80% 정도를 상품권으로 돌릴 계획”이라고 말했다.
롯데백화점 본점 상품권 판매대 역시 대기표를 뽑고 10분 가량을 기다려야 할 정도였다. 대부분 개인 고객인 가운데 100만원어치 이상을 구매하는 기업고객은 가끔 눈에 띌 정도. 150만원어치 상품권을 구입한 한 중소기업 직원은 “협력업체 관계자들에게 선물할 계획인데 지난해와 같은 수준”이라며 “새로 늘어난 관계회사도 챙겨야 되지만 회사 사정이 어려워 일단 가장 중요한 거래처만 선물할 계획”이라고 귀띔했다.
한편 11일 일요일을 맞은 재래시장은 제수용품과 추석선물을 준비하려는 사람들로 북적거렸지만 예년에 비해 실제로 상품을 구입하는 사람은 부쩍 줄었고 사는 양도 확연히 줄어들었다는 게 시장 상인들의 반응이었다.
이날 오후 서울 성동구 금호동의 금남시장. 사과ㆍ배 등 선물세트를 둘러보러 왔다는 한 40대 주부는 "할인점보다 쌀 것 같아 재래시장에 나왔는데 생각보다 가격 차이가 많이 나지 않는다"며 "아무래도 다시 할인점으로 가서 기획상품을 알아봐야 할 것 같다"고 말했다.
가족과 함께 쇼핑을 나온 한 회사원은 "선물세트는 어제 백화점에서 이미 샀고 추석 때 쓸 제수용품은 할인점에서 사는 게 낫지 않겠느냐"면서 "아이들에게 재래시장을 구경시켜 주려고 나왔다"고 말했다.
매장을 둘러보기만 하는 사람들 때문에 짜증을 내는 상인들도 눈에 띄었다. 금남시장에서 10여년째 과일만 팔고 있는 박모씨는 "사지 않을 거면 그냥 가라"며 손사래를 쳤다. 그는 "요즘 재래시장에 오는 사람들은 꼭 필요한 적은 양만 사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라며 "비교적 마진이 높은 선물세트 같은 건 아무리 갖다 놓아도 팔리지 않는다"고 말했다.
수산물을 파는 한 코너. 깐깐해 보이는 30대 주부와 주인이 굴비 원산지를 둘러싸고 시비가 한창이었다. 중국산이라 믿을 수 없다는 주부의 말에 중국산도 품질 따라 다르니 믿고 사라는 주인간의 설전이 오가는 중. 결국 주부는 10여분간의 실랑이 끝에 굴비 3마리를 사고 돌아섰다. 이 가게 주인은 "요즘 시장에 중국산 아닌 게 어디 있느냐. 국산은 너무 비싸서 팔리지도 않는데…"라며 울상을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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