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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역사상 유례 없는 500억 달러의 워크아웃. 그것은 어찌 보면 나라경제의 명운을 건 ‘실험’이었다. 누구도 성공할 것이라고 자신할 수 없었다. 독약과도 같은 처방들이 난무했다. 대우 해체 작업은 김우중 회장의 험난했던 여정보다 오히려 지난(至難)했다. 국민들은 6년전의 그 끔찍한 시간들을 망각했지만…. 대우 워크아웃 직후인 99년 9월4일. 비서관들을 모은 김대중 대통령의 얼굴은 어두웠다. 비장함 마저 묻어나왔다. “재벌개혁이 이토록 어려운 줄은 몰랐다. 내 평생 이렇게 힘들었던 적이 없다. 대우 처리를 잘 하느냐 못하느냐에 따라 나라 운명이 좌우된다.” 그의 눈 앞에 펼쳐진 상황은 암울했다. 대우 워크아웃은 ‘위기의 끝이 아니라 시작’이었다. 재정경제부 관료는 힘들었던 상황을 이렇게 전했다. “외국 은행들이 크게 동요했습니다. 3~4개 은행이 동시에 우리 대기업에 대한 만기 연장을 못하겠다고 하더군요. 대우가 워크아웃되니까 자연스럽게 ‘5대 재벌도 안전하지 않다’는 생각을 품게 된 것이죠.” 대우 붕괴의 화살은 곧바로 다른 재벌들에게 이어졌다. 중심에는 현대가 서 있었다. 국제금융센터가 9월10일 대외비로 만든 보고서에는 위기감이 고스란히 녹아 있다. “대우사태 후 국내 다른 그룹, 특히 현대에 대한 외국 은행의 주목할 만한 변화가 감지되고 있다. 오세아니아계 은행 서울지점은 본점으로부터 현대와 어떤 거래도 중지하도록 지침을 받았다. 크레디리요네 등은 현대 현지법인의 만기 자금에 대해 연장기간을 3개월로 제한했다. 외화유동성 부족사태에 대한 대비책을 시급히 마련해야 한다.” 위기 뒤에 찾아온 새로운 위기. 살얼음판이었다. 대우 워크아웃은 이처럼 시작부터 힘겨웠다. 시계추를 조금 앞으로 돌려 99년 8월말. 뚜껑 열린 대우의 몰골은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끈적끈적 얽힌 계열사들의 모습은 끝없이 잘라도 들러붙는 터미네이터를 연상시켰다. 수만개 협력 업체들은 거래를 차단당한 채 비명을 질렀다. 금융감독원이 시중은행 창구지도까지 하며 윽박질렀지만 통하지 않았다. 워크아웃도 해보기 전에 붕괴될 것이라는 불안감이 엄습했다. 이성규 기업구조조정위원회 사무국장. 이헌재 금감위원장의 왼팔로 워크아웃이란 개념을 도입한 인물이다. 이헌재는 40대 초반의 그에게 임무를 맡겼다. 100개가 넘는 부실 기업을 처리하며 ‘Mr. 워크아웃’이라는 닉네임을 얻었지만, 대우 앞에선 기가 질렸다. 사무실 입구의 걸개그림을 보며 흘리듯 말을 던졌다. “(남산을 정면으로 담은)이 그림이 남산을 등진 대우의 워크아웃을 맡을 것을 예시한 것 같아.” 실사를 통해 드러난 대우는 ‘부실 덩어리들이 한데 섞인 진화하지 못한 공룡’이었다. 난마처럼 얽힌 계열사간의 고리를 잘라내는 일이 시급했다. 재벌이란 울타리를 벗어 던지고 독립해 살아갈 방법이 필요했다. 하지만 이 모든 일도 빚쟁이들을 달래 놓지 않으면 허사. 그들에게 “대우가 어떻게 살아 갈 수 있을까”는 안중에 없었다. 워크아웃에 들어가자 마자 김 회장이 몇 달 전 맡겨 놓은 ‘고깃덩이(담보물)’를 향해 덤벼 들었다. 빚잔치였다. 그가 던진 물건들의 값어치가 얼마나 되는지 조차 가늠하지 못하면서. 전직 금감원의 고위 간부는 쓴 웃음을 지었다. “김 회장이 7월에 10조원의 담보를 내놓지만 주식과 부동산 가격은 형편 없어지니 실제 가치는 5조도 되지 않더군요. 6조는 신규 자금을 지원한 곳에 충당하고, 나머지는 만기를 연장해준 곳들에 주려 했죠. 헌데 5조도 안 되는 것을 갖고 나눠야 하다니….” 문제는 여기서 발생했다. 내가 돈을 빌리는 대신 이 만큼을 줄 테니 너희들이 알아서 배분하라는, 이른바 ‘공동담보’의 허수(虛數)가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담보 가치뿐 아니었다. 외환은행 대우 담당자가 전한 발언은 신화가 몰락하기 직전, 김 회장은 물론이고 우리 정부와 금융 기관들도 얼마나 다급했는지를 여실하게 드러냈다. “경황이 없었나 봐요. 담보를 맡긴 계열사와 돈을 빌려간 곳이 다른 상황까지 생겼어요. ㈜대우는 100원 만큼 담보물을 내놓고 10원밖에 지원받지 못한 반면, 대우차는 30원 담보로 50원을 가져간 거죠. 한심한 일이었죠. ” 대우가 맡긴 담보물을 원래대로 되돌려야 하는 촌극이 발생한 것이다. 하지만 그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계열사별로 돌려 놓다 보니 이번에는 담보가 부족한 계열사들이 돈을 빌릴 수가 없었다. 도대체가 제대로 되는 일이 없었다. 결국 택한 방법은 한가지, 김 회장 맡겨 놓은 1조3,000억원 어치의 개인 담보를 당겨 써야 했다. 자신이 키워온 분신(分身)들에게 마지막 생존의 씨앗을 안겨 줬다고 할까. 오호근 전 기업구조조정위원장은 당시 상황을 이렇게 말했다. “공동담보 문제는 말도 안 되는 거였습니다. B에게 돈을 줬는데 C가 쓴 것이라면, B의 채권자 입장에서 보면 배임이잖아요. ㅊ慣沮?관여가 됐다니….” 어찌됐든 담보 문제는 한달여에 걸쳐 어렵사리 해결했다. 이젠 계열사들이 ‘홀로 살기’를 할 수 있게 만드는 일이 남았다. 끈적끈적 달라붙은 계열사들, 한마디로 터미네이터 분리하기였다. 당연히 쉬운 일이 아니었다. 당시 실사를 담당했던 한 회계사의 말에는 몰락하기 직전 상황이 담겨 있다. “㈜대우를 중심으로 거래는 없이 돈만 오간 가짜 서류들이 난무했죠. 암호를 해독하는 수준이었어요. 나중에는 겁까지 버럭 나더군요. 괜스레 맡았다는.” ‘계열사간 대여금’의 해법 찾기. 김 회장이 자동차를 살기 위해 계열사들을 무차별적으로 동원한 흔적은 정리조차 힘들었다. 방법이 없었다. 돈을 빌려주기 전 상태로 돌리는 것밖에. 워크아웃에 들어가기 전날인 8월25일을 기준점으로 삼았다. 계열사들끼리 빌린 자금을 서로 갚게 했다. 돌려 받지 못한 회사들은 담보 없이 신용으로 빌려준 채권자와 같은 자격을 줬다. 대신 예외를 뒀다. 대우중공업에게는 특별 대우를 해주었다. 대우차에 경차 부분을 넘겨주고도 받지 못한 돈은 담보 있는 채권자처럼 대접해줬다. 멸망하기 직전까지 대우차의 최우선 전위부대로 활동한데 대한 보은(報恩)이라 할까. 세포 분리는 이 것으로 끝나는 게 아니었다. 이번에는 서로간에 얽혀진 지분 관계를 정리해줘야 했다. 그래야 진정으로 독립 경영을 할 수 있을 테니. 진통 끝에 계열사별로 출자한 지분을 팔도록 했다. 한 회사가 다른 곳 지분을 갖고 있어도 경영에는 간섭하지 못하도록 하고. 고리를 끊기 위한 작업, 워크아웃 실험은 그런대로 굴러갔다. 하지만 500억달러 짜리 수술이 이 정도로 끝나리라고 기대했다면 오산. 대우는 100개가 넘는 워크아웃 기업과 다른 ‘무엇’이 있었다. 바로‘비협약 채권’이란 이름의 빚쟁이들이었다(워크아웃은 1ㆍ2금융권이 중심을 이룬 ‘신사 협정’이었다. 비협약 채권은 바로 협정 밖의 채권자를 말한다). 대우는 바로 ‘울타리 밖’채권자들이 전체의 70%나 됐다. 이들을 처리하지 않고는 워크아웃도 구조조정도 불가능한 일이었다. 대우 처리를 그렇게 힘들게 했던‘아웃사이더들의 합창’과 이들을 달래기 위한 독약처방, 그 것은 워크아웃 한달 전부터 시작된다. 99년 7월20일. 김 회장이 자구계획을 발표한 다음날, 여의도의 투신사 창구에는 수십명의 고객들이 한꺼번에 몰려 들었다. 당시 투신사 수신고는 250조원까지 늘어난 상황. 이중 대우채가 들어간 채권형 펀드만 110조, 대우에 암운이 드리워진 99년초까지도 20~30%의 고금리에 취해 대우채를 사들였던 사람들이었다. 신화가 몰락하자 그들은 서둘러 돈을 빼가기 시작했다. 하루에만 2~3조원의 엑소더스. 투신사들은 돈을 마련하기 위해 보유 채권을 무차별적으로 팔았다. 당시 정부 고위 관료의 말에는 절박함이 흘렀다. “비상계엄이라도 있다면….” 8월초 금감위 기자실. 이헌재 위원장이 황망한 표정으로 검은색 소파에 앉았다. “특별 대책이 준비되고 있다면서요.”라는 기자의 질문에 대한 그는 답변은 역시 노련했다. “다 알면서….”, 하지만 얼굴에는 당혹스러움이 역력했다. ‘초유의 대책’, 특별대책반의 김석동 실무반장은 호텔을 전전했다. 대책은 ‘BFC’만큼이나 비밀스럽게 이뤄졌다. 8월12일 오후 8시가 조금 넘은 시간. 김종창 금감위 상임위원이 기자실에 내려왔다. “보유 기간에 따라 펀드에 편입된 대우채의 50%, 80%, 95%씩 지급한다.” 우리 금융시장 역사에 ‘다시는 반복돼서는 안될’, 그래서 너무나 부끄러운 ‘8ㆍ12 환매연기조치’는 이렇게 등장했다. 그리고 이어진 ‘11월 대란설’과 이를 막기 위한 30조원 규모의 채권시장안정기금 조성에 이르기까지…. 시장 붕괴를 막기 위해 증권 투자자들에게 정부가 혈세를 퍼부으며 책임져주겠다고 사실상의‘보증서’를 써주는 ‘독수(毒手)’, 김 회장은 경제사에 있을 수 없는 일들을 만들어냈다. 그리고 그 푸닥거리는 해외 채권자들과의 협상에서 다시 이어진다. ⇒(다음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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