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 때 대기업 계열사의 CEO를 지내기도 했던 이강복씨는 대부도에서 8년째 포도농사를 짓고 있다. 농사에 경영기법을 접목하고 있는 이씨는“아들이 원한다면 농사를 시킬 것”이라고 말했다. /박영홍(사진작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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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2000년 양평으로 터전을 옮긴 임승기 교수는 55세가 되는 해에 마을 노인회에 가입했다. 요즘도 주 3시간씩 강의를 하고 있는 그는 "장날 읍내로 나가 순대를 사먹는 재미가 쏠쏠하다" 고 말했다. /양평=우현석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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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빙 앤 조이] 전원에서 펼치는 인생 2막
新歸去來辭
안산ㆍ양평=글ㆍ사진 우현석기자 hnskwoo@sed.co.kr
춘천=글ㆍ사진 맹준호 기자 next@sed.co.kr
한 때 대기업 계열사의 CEO를 지내기도 했던 이강복씨는 대부도에서 8년째 포도농사를 짓고 있다. 농사에 경영기법을 접목하고 있는 이씨는“아들이 원한다면 농사를 시킬 것”이라고 말했다. /박영홍(사진작가)
지난 2000년 양평으로 터전을 옮긴 임승기 교수는 55세가 되는 해에 마을 노인회에 가입했다. 요즘도 주 3시간씩 강의를 하고 있는 그는 "장날 읍내로 나가 순대를 사먹는 재미가 쏠쏠하다" 고 말했다. /양평=우현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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歸去來兮 田園將蕪胡不歸 旣自以心爲形役 奚以獨悲
(나 이제 벼슬에서 물러나 내 집의 논밭으로 돌아가노라. 전원이 황폐하거늘 어찌 돌아가지 않을 수 있으련가? 벼슬을 사는 동안 정신을 육신의 노예로 괴롭혔거늘 어찌 혼자 한탄하고 슬퍼만 할손가?)
吾已往之不諫 知來者之可追 實迷途其未遠 覺今是而昨非
(지난 일은 탓해야 소용이 없고, 바른 길을 좇는 것이 옳음을 깨달았으니, 내 비록 길을 잃고 헤매기는 했으나 아직 멀리 벗어나지는 않았음에, 지난 날의 벼슬살이가 잘못이었음을 깨달았노라.)
‘귀거래사’(歸去來辭)는 동진(東晉)에서 송대(宋代)까지 걸쳐 살았던 시인 도연명(陶淵明)이 41세 때에 누이의 죽음을 핑계로 펑쩌현(彭澤縣)의 현령(縣令)을 사임한 후 고향으로 떠나며 남긴 시다. 일종의 퇴관 성명서라고도 할 수 있는 이 시에 대해 사전(史傳)은 “도연명이 상관의 순시 때에 마중을 거절하고, ‘나는 쌀 다섯말(五斗米)때문에 향리의 소인(小人)에게 허리를 굽힐 수 없다”고 사직한 후 읊은 시라고 적고 있다.
요즘에야 낙향을 하는 사람들이 모두 도연명 같은 관리도 아닐테고, 당시 처럼 세상이 부패하지도 않았을테지만 치열한 일상의 경쟁을 벗어나 전원의 삶을 꿈꾸는 인간 심리는 1500년의 세월을 넘나든다.
다만 도연명과 현대인이 읊조리는 귀거래사에 차이점이 있다면 도연명의 노래는 전원의 삶을 예찬하는 와중에도 현실도피의 냄새를 풍기는데 비해, 현대인의 귀거래사는 제2의 인생을 꿈꾸는 여유 속에서도 생존을 위한 치열함이 엿보인다.
리빙앤조이팀은 지난 2주간의 준비 끝에 다람쥐 쳇바퀴 도는 듯한 도시의 삶을 과감히 박차고 농촌으로 터전을 옮긴 3명을 취재했다. 이들은 그 동안 자신들이 몸 담았던 분야에서 이뤄 놓은 업적과 주위의 만류를 뿌리치고 새로운 환경에 둥지를 튼 사람들이다.
이 기사를 읽고 있는 당신은 혹시 인생 2막을 시작할 새로운 도전을 꿈꾸고 있는가.
아니면 십수년 이상 당신의 정열을 불사른 직장이 당신을 버리려고 하거나, 운영하는 사업이 마음대로 안되는가. 아니 어쩌면 이제 당신은 남은 생을 자연의 품안에서 아름답게 가꾸려 하는가.
이제 우리는 당신 보다 먼저 흙으로 돌아가 새로운 삶을 시작한 세 사람의 이야기를 시작하려고 한다. 이들은 저 마다 다른 환경에서 살다가 농촌으로 삶의 터전을 옮겼고, 살아가는 방식도 제각각 다른 사람들이다.
낙향을 꿈꾸는 사람들의 상황이 모두 다른 만큼, 리빙앤조이팀은 공통 분모를 가진 이들을 찾아 한 데 묶으려 하지 않았다.
처했던 상황과 여건이 다를지라도 이들이 쏟아내는 진솔한 경험담은 자연에 몸을 맡기려는 당신을 위한 응원이자 격려이며, 귀기울여 들을 만한 선배의 충고 일 것이다.
長期계획 세워 차근차근 준비를
■CEO에서 농부로-대부도 이강복씨
CEO생활 접고 포도농사 작년 매출 6,000만원 "몸이 먼저 적응하니 육체노동 두려워 말길"
경기도 안산시 대부도 대부남동 대남초등학교 앞.
마을에서 가장 큰 건물인 초등학교 앞에서 흰 머리에 구릿빛 피부가 건강해 보이는 중년의 남자가 기자를 기다라고 있었다.
검게 그을린 피부에 단단해 보이는 체격의 이 남자는 짐작대로 대부도에서 8년째 포도농사를 짓고 있는 이강복(57)씨였다.
이씨는 서울대학교 공과대학을 졸업하고, 영국 크랜필드 공대(Cranfield institute of Technology)를 거쳐 대우중공업 헬기부장, 자동화기술부장을 지낸 엘리트 출신으로 97년까지 세아그룹과 프랑스의 슈나이더일렉트릭(schuneider electric)이 합작한 세아산전 대표이사를 지낸 전직CEO 출신이다.
그런 그가 농사를 짓기로 마음 먹은 것은 98년경. 세아산전 대표를 그만 두고 소프트웨어 업체를 차려 1년간 경영 했는데 인력확보가 어려웠다. 마침 IMF로 온 나라가 몸살을 앓던 와중이라 '잘못하다가는 그나마 있는 재산 다 까먹겠다' 싶어서 농사를 짓기로 했다. 땅은 노력의 대가를 저버리지 않을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가 있었다. 또 땅을 밟고 살면 지병인 협심증이 나을 것이라는 생각도 들던 터였다.
이씨는 98, 99년 2년 동안은 상속 받은 땅에 포도나무를 심고 하우스를 만드는 준비작업을 하다가, 2000년부터 아예 눌러 앉아 농사를 짓기 시작했다.
이씨는 "처음에는 그냥 투자 차원에서 농사를 지어보려고 했지만 막상 농사를 지어보니까 '팔을 걷고 나서지 않으면 안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그는 "처음에는 포도 농사에 대해 공부를 많이 해서 잘 될줄 알았는데 기대한 만큼 수입이 안나왔다"며"농사는 생각 만큼 쉽지 않고, 공장에서 일해서 제품을 생산하는 것 보다 변수와 리스크가 많은 편"이라고 했다.
하지만 이씨는 타고난 부지런함으로 소 처럼 일했다.
비가 와서 마을 사람들이 쉬는 날에도 그는 우비를 입고 일했다. 그렇게 열심히 일을 했더니 마을 사람들도 그를 보는 눈이 달라졌다. 그런 만큼의 그의 현지 적응도 가속도가 붙었음은 물론이다. 이웃들도 처음에는 "서울 사람이 농촌에 내려와서 얼마나 잘 할 수 있을까"하는 눈길로 쳐다 봤지만 이씨가 적응하는 걸 보고 놀라워 했다.
이제 포도 농사에 이력이 생긴 그는 1000여 농가로 구성된 31개 작목반 중 한곳의 작목반장을 맡으면서 포도작목반 연합회장도 겸직 하고 있다. 그의 직책은 현지화 성공을 입증하는 증명서인 셈이다.
현재 그가 경작하는 포도밭은 4,000평 정도. 그는 지난해 포도를 팔아 6,000만원의 수입을 올렸다. 이씨는 "작년에 올린 수입 6,000만원은 내가 직장생활을 끝내던 해에 받았던 연봉 수준"이라며"연 매출 1억을 달성하는게 목표"라고 말했다.
그는 또 현지화의 비결을 묻는 기자에게 "농촌에 정착 하려면 최소한 7,8년은 몰입을 해야한다"며"농사를 지을 생각이라면 한 몫에 투자하지 말고 어깨 너머로 배우는 수습기간을 거쳐 단계적으로 규모를 늘려가야 실패의 확률을 최소화 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자리를 털고 일어서며 기자에게 한 마디 더 했다. "처음 농사를 시작할 때는 무지하게 노력을 했는데도 성과가 없었지만 해가 갈수록 나아진다는 사실이 너무 좋았어. 사람들은 힘든 일을 어떻게 감당할까 걱정을 하지만 막상 닥치니까 몸이 마음 보다 더 빨리 적응하더라고. 원래 농사를 짓던 분들은 자식들이 농사를 짓지 말았으면 하지만 나는 내 아들이 농사를 짓겠다고 해도 말릴 생각이 없어요. 사실 요새 대학 졸업해가지고 어디 가서 연봉 1억을 받아?"
■양평에 울리는 전원교향곡-임승기교수
땅 사고 20년 동안 준비 자녀 사교육 일체 안해…"받아준 지역사회에 봉사 인근서 클래식 강좌도"
경기도 양평군 불곡리 37번 국도변.
도로 양쪽으로 널린 논밭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은 오디오숍 하나가 자리를 잡고 있다.
'환뮤직'(www.fanmusic.co.kr)이라는 입간판을 세워 놓은 이 곳에서는 매월 넷째주 금요일 7시가 되면 클래식음악 감상회가 열리고, 반백의 노신사가 느릿한 말투로 클래식 음악의 해설을 시작한다.
한갓져 보이는 전원에 클래식 음악으로 화룡점정(畵龍點睛)한 이 사람은 2년전 성균관대학교를 퇴직한 임승기 교수.
80년대초 임교수는 우연히 드라이브를 하다가 양평군 강상면 병산리의 아름다운 경치에 반해 차를 세운 후 이 땅에 터를 잡기로 결심했다. 고향이 전북 김제와 만경 사이의 호남 평야였던 터라 임교수의 마음은 일찌감치 전원을 향해 있었고, 땅을 매입한 그는 이후 20년 동안 틈만 나면 이곳을 찾아 터전을 가꿔왔다.
임교수는 "땅을 매입했을 때 돼지를 잡아서 땅을 파신 분과, 동네 어르신들을 모셔 잔치를 하고 그 자리에서 큰 절을 올렸다"며 "그렇게 이웃들과 20년을 왕래한 다음 이사를 해서인지 적응에 어려움은 없었다"고 말했다.
또 임교수는 55세가 되는 해에는 노인회에도 가입하고, 경조사에도 적극 참여하는 등 마을 사람들이 품에 안아준 것에 보답하기 위해 최선을 다 했다.
그렇게 서울과 양평을 오가던 임교수가 병산리에 둥지를 튼 것은 지난 2000년 8월. 임교수는 황토집을 짓고 아예 터전을 옮겨 버렸다.
병산리 주민이 된 임교수는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전원생활의 즐거움에 빠져 들고 있다.
지역 주민과 同化에도 신경써야
민주화 운동하다 4년전 낙향 유기농·무공해 농사 시작 귀농 첫해 소득 150만원
"낭만·충동적 결정은 금물"
지난 90년 그의 나이 51살, 아내의 나이 26살에 지각 결혼을 해 얻은 중학교 3학년 짜리 아들과 초등학교 4학년 짜리 딸이 자연 속에서 마음껏 뛰놀며 자라고 있는데다, 부부도 양평의 여유로움을 만끽하고 있기 때문이다.
임교수는 "사람들은 교육을 위해 서울로 가지만 나는 아이들을 이곳 학교에 보내고 있다"며 "딸이 피아노 학원에 다니는 것을 제외하면, 아이들에게 사교육을 하는 것은 없고 그냥 교육방송을 보게 하고 책을 많이 읽힌다"고 말했다.
그는 또 "집에서 읍내까지 차로 10분 거리여서 장이 서면 읍내로 나가 구두 수선도 하고, 우산 고치는 것도 구경하고, 장날 마다 구제품 옷을 팔러 오는 아주머니의 옷 구경도 하다가 아이들 마음에 드는 옷이 있으면 사 입히기도 한다"며 "순대 사 먹고, 장 구경하는 것은 빼 놓을수 없는 낙"이라고 말했다.
그는 매월 넷째주 금요일 저녁에 진행하고 있는 '임승기교수와 함께 하는 클래식이야기'를 진행하게 된 사연을 묻자 "여주를 다녀오다 이 곳이 눈에 띄어 들어왔는데, 이 얘기 저 얘기 하다보니 주인 김동환 사장과 의기 투합해서 벌이게 된 일"이라며 "독일유학 시절 문학을 공부하면서 부전공으로 서양미술사, 음악학, 철학을 공부한 걸 바탕으로 클래식 해설을 하고 있다"고 밝혔다.
임교수는 "청중이 많든 적든 이 모임을 귀하게 여기는 사람들이 늘어나서 충주에서 오는 사람들도 있다"며"어떤 방식으로든 양평 사회의 구성원으로 기여를 하게 된 것에 보람을 느낀다"고 말했다.
■"귀농은 낭만이 아니요"-춘천 김태수씨
"지금 일 해야 되는데…."
강원도 춘천시 사북면 고성리에 사는 자칭 '초보 농부' 김태수 씨(41)는 관리기라고 불리는 농기계를 1톤 트럭에서 내리며 바쁘다는 표정부터 지었다. 해 떨어지기 전, 파종해 놓은 참깨밭에 비닐 씌우기를 마쳐야 하기 때문이다. 참깨는 그래야만 싹이 돋는다.
귀농은 화풀이 식으로 '에이, 농사나 지어야겠다'고 말하는 사람이나, 막연히 전원의 낭만을 꿈꾸는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 절대 아니다. 큰 재산을 모아 두고 취미로 텃밭 농사나 지을 사람이 아니라면, 농사는 엄연한 현실일 뿐 결코 낭만적이지 않다. "일해야 된다"는 김 씨의 첫마디에는 이런 사정이 함축돼 있다.
행정구역으로는 춘천시지만, 의암댐과 춘천댐을 지나 굽이굽이 돌아가서 만날 수 있는 전형적인 시골이 김 씨의 터전. 그야말로 드라마 '전원일기'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곳이다.
김 씨는 이곳에서 6,000평 정도 농사를 짓고 있다. 주 작물은 고추이며 참깨와 더덕 농사도 함께 짓는다. 주로 노지 밭농사지만, 일부는 시설 경작도 한다.
"귀농 5년차인데요, 지금까지 가족 생계에 들어간 비용의 80%는 교사인 아내의 수입이었다고 보면 됩니다."
소득 면에서만 보자면 김 씨의 귀농 이후 생활은 그렇게 윤택하진 않다. 2002년 귀농 첫해에 올린 연간 소득은 고작 150만 원. 이듬해에는 400만 원을 벌었고 3년차가 되자 1,000만 원을 넘겼다. 지난해는 2,000만 원을 벌었는데 올해도 이 정도를 예상하고 있다.
많지 않은 김 씨의 소득은 곧 농촌의 현실이기도 하다. 김 씨에 따르면 노지 참깨의 경우 평당 연간 3,000원 소출이 나오는데 1,000평 농사를 지어봐야 연간 300만 원밖에 벌 수 없다. 종자, 재료, 기계 등 투자비를 감안하면 생활하기에 턱없는 수준. 땅 1,000평을 샀다고 가정하면 토지 구입비용의 이자밖에 되지 않는다.
흔히들 하우스라고 부르는 온실 농업은 그래도 효율이 괜찮은 편이다. 하우스 300평 농사지으면 연간 900~1,000만 원의 소출을 올릴 수 있다.
김 씨는 그래서 "귀농자는 작은 평수에 경작해 알차게 뽑는 편이 낫다"고 조언한다. 웬만한 농토 가격이 평당 10만 원이 넘기 때문에 작은 평수를 집중 관리해서 생산단가를 높이는 게 낫다는 설명이다.
김 씨는 젊은 시절 노동운동을 하다 민주노동당과 민주노총에서 상근자로 직장생활을 했었다. 대학은 한양대 중어중문학과를 84년 입학해 97년에야 졸업했다. 13년 만에 졸업하기까지는 학생운동과 노동운동, 그리고 3년 간의 옥살이가 있었다. 92년 이른바 '시국사범'으로 잡혀들어가 3년형을 받고 에누리 없는 만기를 채웠다.
김 씨가 직장생활을 떠나 귀농을 결심하게 된 계기는 본인의 희망도 있었지만 여러 가지 현실적인 여건이 잘 맞았기 때문이다. 우선 춘천 고성리에 종중 소유의 땅이 있었고, 공립학교 교사인 부인이 춘천시로 발령을 받아 결심을 굳힐 수 있었다.
처음에는 어려움이 많았다. 농사일로 무릎 허리 등 온몸이 쑤시는 육체의 고통은 2년 넘게 계속됐고, 도시에서 겪던 여러 가지 상념 또한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그러나 정착에 어느 정도 성공한 지난해에는 부모님까지 모셔와 함께 농사일을 하고 있다.
김 씨는 인터넷에서는 꽤 유명한 귀농자다.
인터넷에 '새낭골 귀농일기'(www.senang.co.kr)라는 홈페이지를 열고 자신과 가족의 삶에 대한 얘기와 영농 일지를 싣고 있다. 농사일로도 바쁠텐데도 홈페이지까지 운영하게 된 계기가 재미있다.
"홈페이지를 연 의도는 세상과의 소통 기능이 절반, 소비자 직거래 기능이 절반입니다. 대규모 농업이라면 한 해 소출을 도매시장 시스템에 넘겨도 괜찮지만 저와 같이 유기농을 하는 소농은 직거래밖에는 방법이 없습니다. 땅은 거짓말을 안 하지만 유통은 거짓말을 하더군요."
김 씨는 "사실 삶의 질이 썩 높아진 건 아니다"라면서도 "직장생활에서 늘 긴장상태로 있어야 했던 것이 없어져 마음이 느긋해 졌다"고 농촌 생활의 장점을 설명했다. 그러나 치열하게 살았던 기억은 쉽게 지워지지 않기 마련이다.
"한편으로는 찔리기도 해요. 나 혼자 속 편하려고 이러고(농사짓고) 있는 건가… 이런 생각도 들고요. 세상 일에 관심 많고 사회 현실이 답답한 것도 여전합니다. 그래도 자연을 접한 삶은 분명 다릅니다. 아이들도 나이가 들면 자연을 벗한 어린 시절을 그리워하게 될 겁니다."
입력시간 : 2006/05/10 1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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