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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주가치 훼손 행위 좌시 않겠다"


기관투자자들의 의결권 행사를 놓고 논란이 일고 있는 가운데 국민연금이 의결권 행사를 대폭 강화하는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국민연금은 횡령ㆍ배임 등의 혐의로 1심 판결이 난 인사에 대해서는 이사 선임에 반대하기로 했다. 대법원(3심) 확정 판결이 나야 거부권을 행사하던 기존 방침을 바꿔 이사선임 거부권 행사의 기준 시점을 대폭 앞당긴 것이다. 국민연금의 이 같은 방침은 “기업들이 주주가치를 훼손할 때는 좌시하지 않겠다”는 강한 의지가 반영된 것으로 풀이된다.

국민연금 기금운용위원회는 지난 19일 의결권행사 전문위원회 2012년도 2차 회의를 열고 이 같은 내용을 논의했다고 21일 밝혔다.

우선 횡령ㆍ배임 등 지배주주의 명백한 주주가치 훼손행위가 발생할 경우 감시ㆍ감독 의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한 이사와 감사의 연임을 최소 3년간 반대하기로 했다. 주주가치 훼손행위가 발생한 시점은 원칙적으로 1심 확정판결이 난 때로 정하되 비자금 계좌 등 객관적 증거가 있는 경우 검찰 기소 시점부터 적용한다는 방침이다.

국민연금 관계자는 “대법원 확정판결까지 7~8년의 시간이 걸릴 수 있는데 이사 임기는 보통 3년에 불과해 사실상 거부권 행사를 할 수 없었다”며 “주주가치 훼손 이력이 발생한 시점을 1심 판결 시점으로 앞당기고 거부권 행사 기간을 명시해 논란의 소지를 없앴다”고 설명했다.

거부권 행사 시점을 앞당기면서 이사 선임에 제동이 걸리는 기업도 늘어날 전망이다. 특히 한화(김승연 회장)ㆍSK(최태원 회장) 등 경영진의 횡령ㆍ배임 혐의로 검찰 수사가 진행중인 일부 대기업의 이사 재선임에 반대목소리를 낼 가능성도 있다. 한화와 SK 주주총회는 오는 23일 열린다.

의결권행사위가 이 같은 방침을 정한 것은 지난달 국민연금이 하이닉스 임시 주주총회에서 최태원 SK그룹 회장의 사내이사 선임에 반대하지 않고 중립(섀도우보팅) 의견을 제시하면서 국민연금의 소극적인 주주권 행사가 도마 위에 오른 데 따른 것으로 풀이된다. 당시 김우찬 KDI국제정책대학원 교수 등 전문위원 2명은 “횡령ㆍ배임 혐의로 재판을 받고 있는 최 회장의 대표이사 선임을 반대하지 않은 것은 전형적인 재벌 봐주기”라며 의결권행사위 전문위원직을 사퇴하기도 했다.

국민연금 관계자는 “최 회장의 경우 당시 1심 확정 판결이 나지 않았고 명백한 증거가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에 중립 의견을 낸 것”이라고 해명했다.



이사 책임경감 등 정관 개정 사항에 대해선 개정 상법과 충돌한다는 여론을 의식해 주주가치 훼손을 막는 견제장치를 마련할 경우 허용하는 ‘조건부 찬성’으로 한걸음 물러섰다. 대림산업, 풍산, 풍산홀딩스 등 일부 기업이 내달 시행되는 상법 개정안을 반영해 이사책임 경감, 재무제표 승인의 의결주체 변경 등을 주요 내용으로 하는 정관 변경을 추진하자 국민연금은 주주가치 훼손 가능성을 근거로 반대표를 행사했고 이들 기업들은 관련 내용을 자진 철회하기도 했다. 하지만 국민연금의 반대가 법 개정 취지에 역행한다는 주장이 잇따라 제기되자 국민연금은 주주가 경영진을 감독할 수 있는 보완장치를 마련하는 경우 찬성한다는 입장으로 선회한 것이다.

국민연금이 이사의 책임 경감에 대한 결정을 주총 특별결의에 의한다고 정관에 정할 경우 찬성한다는 입장을 밝힌 데 대해선 과도하다는 지적도 나왔다. 류광춘 한국상장회사협의회 조사팀장은 “일반 결의는 출석주주의 3분의1 혹은 주식의 4분의 1이 동의할 경우 안건이 통과되지만 특별결의는 출석주주의 3분의 2, 주식의 3분의 1이상이 찬성해야 한다”며 “상법 상 특별결의는 임원 해임, 지배구조 변화, 합병 등 중대한 사안이 있을 때만 실시하도록 하는데 이사 책임 경감을 특별결의로 정한다는 것은 과도하다”고 지적했다.

적정한 배당정책을 갖고 있는 기업에 대해서 재무제표 승인 주체를 변경하도록 한다는 지침 역시 “적정한 배당정책의 기준이 모호해 기업들의 혼란만 가중시킬 수 있다”는 게 상장협의 입장이다.

주주총회 시즌이 막바지에 다다른 시점에서 국민연금이 이 같은 입장을 밝힌 것은 지나치게 늦은 것이 아니냐는 지적도 나온다. 한 상장사 관계자는 “국민연금이 개정 상법 내용을 반영한 정관 변경에 제동을 걸면서 일부 기업이 관련 내용을 삭제하는 등 이미 기업들의 혼란은 커진 상황”이라며 “23일이면 대부분의 기업들이 주주총회를 마치는데 슈퍼주총데이를 불과 이틀 남겨둔 상황에서 세부 지침을 발표한 것은 때늦은 조치 아니냐“고 목소리를 높였다.

하지만 국민연금은 이미 정관 변경 안건에 대한 세부 지침을 마련해 이번 주총 시즌부터 적용하고 있었기 때문에 뒷북이라는 표현은 걸맞지 않다는 입장이다. 국민연금 관계자는 “재무제표 승인 주체 변경 등 일부 개정 내용이 주주 이익을 훼손할 수 있기 때문에 반대 입장을 정했지만 기업의 종합적인 상황을 고려해 찬성표를 던지기도 했다”며 “같은 안건을 상정한 조선내화의 경우 적정한 배당정책을 갖추고 있다는 점 등을 고려해 정관 변경에 찬성했다”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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