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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서 본 금강산] 봉우리 돌때마다 새병풍 열리고
입력1998-11-23 00:00:00
수정
1998.11.23 00:00:00
허두영기자 관광기(중)풍악(楓嶽)의 끝자락이라도 잡아보려던 욕심은 금방 깨졌다. 『단풍은 10월말에 졌시오. 그전에 오셨셔야죠.』 원망일까, 질책일까. 북한 여성 안내원의 구수한 웃음에 내 사진기가 부끄럽다.
그러면 개골산(皆骨山)이라도 봐야지. 두리번거리던 사진기는 초점을 맞추지 못한다. 찍고 싶은 데가 없다. 차라리 눈이라도 내렸으면 시간이 멈춰버린 수묵화라도 찍을텐데….
할! 세속적인 욕심을 부리면 이렇게 된다는 듯 두 동강난 커다란 구렁이가 높은 언덕 위에 널려 있다. 구룡폭포 코스 초입에 있는 닭알바위(계란봉·鷄卵峰)다. 둥근 달걀을 감고 있던 구렁이가 반토막 난 형국이다.
왼쪽에 신계천(神溪川)을 끼고 미인송(美人松)이 울창한 창터솔밭 사이로 술기넘이 고개를 넘으면 아직도 아물지 않은 한국동란의 흉터가 잡초 속에 숨어 있다. 신계사(神溪寺) 터.
신계천에서 물고기가 희생되는 것을 막기 위해 「新」자를 「神」자로 바꿨지만 동족을 죽이는 전쟁에서 떨어지는 포탄을 피하지는 못했다. 바로 뒤 봉우리가 붓처럼 생긴 문필봉(文筆峰)에서 커다란 붓을 뽑아 신계사를 다시 그리고 싶다.
선담(船潭)부터는 걸어가야 한다. 신선들도 타고온 배(船)에서 내려 여기부터 걸어 올라갔다. 오선암(五仙巖)은 다섯 신선이 놀던 자리다. 어느 장마에 거센 물결에 휩쓸려 넘어졌지만 지금도 세 신선 정도는 앉을 수 있겠다.
봉우리가 나오면 길이 막혔는가 싶더니 문득 다시 열리고, 또 새 봉우리가 앞을 막았다가 다시 길을 열어준다. 옆을 따라 흐르는 시내도 끊어졌다 이어졌다 하며 따라온다. 봉우리 한 자락을 돌 때마다 새로운 풍경을 담은 병풍이 한 폭씩 열린다.
앙지대(仰止臺)에 서면 병풍그림 속에 갇힌다. 사방이 봉우리로 둘러싸여 더 이상 우러러볼 곳이 없다. 목덜미가 쑤시기 시작한다. 너무 두리번거린 탓이다. 금강산에 놀러온 개구리가 두리번거리다 눈이 튀어나온 개구리바위가 된 이유를 알 만하다.
땅을 배반한 나무가 팔을 너울거리며 춤추는 듯 우뚝 서 있다. 흙이 아니라 바위에 뿌리를 내린 배지향일송(背地向一松)이다. 바위와 나무를 그린 병풍 한 자락 어디에 봉황이 숨어 있을 것만 같다.
커다란 바위 아래로 두려움을 안고 금강문(金剛門)을 나서면 옥(玉)이 굴러가는 소리가 들린다. 물줄기가 구슬(玉)처럼 맑고 푸르다. 비취 같은 구슬들은 하얀 선율을 일으키며 매끄러운 너럭바위를 타고 옥류담(玉流潭)으로 미끄럼을 친다.
왼쪽 넓은 바위에 봉래(蓬萊) 양사언(楊士彦)이 쓴 「옥류동」(玉流洞)이라는 글씨가 400년이 지난 세월을 지키고 있다. 그 주변에 새겨진 많은 이름의 주인들도 제각기 멋들어진 풍채를 뽐내며 여기를 지나갔을 것이다.
바위의 글씨는 예술일까, 낙서일까. 옛날에 새기면 예술이고 지금 새기면 낙서다. 지금 선녀가 연못에서 목욕을 하면 풍기문란이 될 것이고 그 선녀와 결혼한 나무꾼은 도벌꾼이 될 것이다.
하늘로 오르던 선녀는 실수로 구슬 두 알을 흘리고 갔다. 구슬 두 알은 연주담(連珠潭)이 되어 금강산에서 가장 아름다운 비취빛을 풍긴다. 위에서 보면 물줄기가 비취빛 선글라스처럼 흐른다.
봉황은 어디 갔을까. 여기서 날던 봉황(비봉·飛鳳)과 춤추던 봉황(무봉·舞鳳)이 앙지대의 병풍 속으로 들어간 것일까. 물안개가 바람에 일면 봉황이 날개짓하는 것처럼 보이는 비봉폭포와 무봉폭포에 추운 초겨울의 아쉬움만 흐른다.
아홉 마리 용을 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멀리 보이는 돌계단을 헉헉거리고 오르면 웅장한 절벽에 갇혀 더 나아갈 수 없다. 그래, 용은 이런 곳에 살 거야. 구룡(九龍) 폭포는 과연 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의 시구대로 「천길 흰 비단을 드리운 듯, 만섬 진주알을 흩뿌린 듯」하다.
구룡연(九龍淵)은 토속신앙이 불교에 밀려난 현장이다. 유점사 앞 연못에 살던 아홉 마리 용은 부처(53佛)에게 내쫓겨 여기 숨었다. 지금 한바탕 굿이라도 벌이면 용이 반가운 머리를 내밀 것 같다.
구룡폭포 위에 있는 비룡대(飛龍臺)는 두리번거리다 아픈 목덜미를 어루만지며 아래로 내려다 보는 곳이다. 팔선녀(八仙女)는 저 아래 비취로 된 여덟 욕조(상팔담·上八潭)에서 벌거벗고 목욕을 했을 것이다. 음흉한 나무꾼의 심보를 알아챈 듯 선녀는 간데없고 선경(仙境)만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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