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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수필] 천리포 수목원
입력1999-07-06 00:00:00
수정
1999.07.06 00:00:00
金容元(도서출판 삶과꿈 대표)서해안 태안반도에는 만리포·천리포·백리포·십리포 해수욕장이 연이어 붙어있다. 해변의 길이에 따라 그렇게 이름붙여진 듯하다고 한다.
서해안의 바닷가는 비교적 조용하다. 썰물 때에 멀리 넓게 펼쳐지는 보드라운 백사장과 한폭의 그림을 연상하게 하는 저녁 해지는 풍정(風情)은 인상적이다.
그 해수욕장 바로 가까이 희귀식물의 낙원인 천리포수목원이 자리잡고 있으나 피서객들은 별로 관심을 갖는 것 같지 않다. 제주도 한라산에서 북한의 백두산까지 한반도 전체에 분포된 식물이 대략 3,400종(種)인데 18만평의 천리포수목원 안에는 그 배가 넘는 7,500종이 식재(植裁)되어 있다. 우리 나라는 물론 전세계에서 수집된 식물들로 동양 최대규모의 것이다. 지금은 관련 학계에서도 높이 인정돼 세계수목학회·세계목련학회·세계호랑가시나무학회 등이 이 수목원에서 연달아 개최될 정도가 됐다.
이 수목원은 한국을 사랑해서 평생을 한국에서 지내는 미국인 칼 밀러(한국이름 민병갈 閔丙渴)씨 혼자서 이루어 놓은 것이다. 칼 밀러씨는 회고했다.
『1760년쯤 송인상(宋仁相)회장의 권유로 천리포 부근을 몇차례 다니러 왔었는데 어떤 노인이 찾아와 땅을 사달라고 했다. 땅값이 무척 싸기는 했으나 그 당시에는 길도 전기도 없었던 아주 가난한 지역이었다.』『62년 해변의 절벽땅 6,000평을 구입했고 8년 뒤인 70년 서울에서 재개발로 해체된 기와집 한옥 세 채를 이축(移築)하면서 수목원의 기틀을 잡았다. 몇몇 해송(海松)만이 서 있던 황량한 땅에 나무를 모아 심기 시작했다.』
칼 밀러씨가 주식투자로 돈을 벌어 수목원을 만들었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지만 그것은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 해방직후 미 해군 통역장교로 한국에 온 그는 한국이 좋아 곧 미군정청 법무부에 지원했고 이어 52년부터 82년까지 30년간 한국은행 고문으로 근무했다.
어느덧 79세가 된 칼 밀러씨. 79년에 한국인으로 귀화했으나 아직도 처자식이 없는 홀몸이다. 요즘도 그는 「굿모닝증권」회사에서 일하면서 주말이면 천리포에 내려가 직접 나무들을 돌보며 현장감독을 하고 있다. 수목원은 79년에 비영리 재단법인으로, 96년에 공익법인으로 재인가를 받았다. 칼 밀러씨는 말한다. 『한국인으로 받아준 나의 고국에 어떤 보탬이 되기를 바란다. 수목원은 원래 최소 200년을 내다봐야 한다. 내가 죽은 후에도 나무들은 계속 자랄 것이다』
자기재산·자기아내·자기자식·세속적인 욕심에 더 집착한다고 말이 많은 요즘 세태(世態)에 천리포수목원에서 오늘도 무러무럭 자라는 나무들을 보라고 권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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