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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업 구조조정 '거북이 걸음'
입력1998-09-21 18:04:08
수정
2002.10.22 07:41:03
09/21(월) 18:04
기업구조조정이 이해 당사자인 은행과 기업의 소극적인 자세로 한발도 나아가지 못하고 제자리 걸음을 하고 있다.
기업구조조정의 칼자루를 쥐고 있는 은행권은 책임미루기에 급급하고 기업들은 버티기로 일관하고 있다. 구조조정을 책임지고 있는 금융감독위원회는 기업구조조정이 정체상태에 머물고 있으나 어떻게 대처할 지 몰라 당황하고 있는 상황이다.
◇5대재벌의 한계기업퇴출 지연= 현대, 삼성, 대우, LG 등 5대재벌의 재무담당임원들은 지난주말 상업, 제일, 한일, 외환은행 등 주채권은행의 여신담당임원들과 만나 퇴출기업선정을 연기해 줄 것을 요청했다.
5대재벌과 은행들은 회계법인의 실사를 거쳐 계열사의 지원없이 독자적으로 생존할 수 없는 퇴출대상계열사를 지난 15일까지 선정하라는 금융감독위원회의 지시를 따르지 않은 상태에서 추가로 선정기일 연장을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금감위 당국자는 『뚜렷한 시기도 명시하지 않고 퇴출기업선정을 연장해 달라는 것은 받아들일 수 없다』고 밝혔다. 다른 당국자는 『퇴출대상기업을 발표하지는 않겠지만 이달말까지 정리대상선정을 마무리해야 할 것이다』며 재벌들의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입장을 분명히 했다.
그러나 제대로 퇴출대상기업을 선정할 수 있을 지는 여전히 미지수다. 엄격한 실사를 거치기 보다는 자의적인 판단으로 생색내기 퇴출에 그칠 공산이 크기 때문이다. 일부 은행들의 경우는 재벌들에게 퇴출대상을 고를 것을 주문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지는 상황이다. 재벌들도 퇴출대상을 선정할 경우 자연스러운 정리보다 막대한 비용이 소요되면서 그룹전체의 이미지에 악영향을 주는 점을 우려해 원칙대로 퇴출기업을 선정하는 것을 극히 꺼리고 있다.
금감위 당국자는 『외국인 전문가그룹이 은행 측과 협의해 퇴출기업선정 등 5대그룹의 구조조정에 관여하기 시작했다』면서 『그러나 은행과 기업이 소극적으로 나오는 바람에 이들의 전문적인 지식이 활용될 여지가 줄어들고 있다』고 말했다.
1차 퇴출발표 때 퇴출대상으로 선정된 현대리바트가 계열사인 고려산업개발에 합병되는 등 실질적으로 퇴출되는 기업은 거의 없는 상황이다.
기업들은 계열기업을 청산할 경우 그룹이미지가 악화되는데다 크로스디폴트조항에 따라 다른 계열사의 부채에 대해 상환요구가 들어올 가능성이 있어 불가피하다며 과감한 청산 등을 요구하는 금감위를 못마땅하게 보고 있다.
◇변질된 기업개선작업(WORK-OUT)= 은행 주도로 회생가능한 기업의 가치를 높이자는 취지에서 도입된 기업개선작업이 정부주도로 변질될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다. 은행들이 기업의 정확한 가치를 산정하고 대주주감자 등 손실분담의 원칙아래 출자전환, 부채탕감, 신규자금지원 등 각종 지원을 실시해 기업의 가치를 높여야 하는데 아무것도 결정하지 않고 모든 것을 사실상 정부의 결정에 의존하려 하는 태도를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채권금융단이 워크아웃 대상인 거평그룹에 대한 자율적인 워크아웃 플랜을 마련하지 못하고 기업구조조정위원회에 해결책을 의뢰한 것이 대표적인 사례다.
워크아웃을 신청한 거평화학, 거평제철화학, 거평시그네틱스 등 거평그룹 3개사는 회사내용이 양호한데다 워크아웃 조건으로 부채탕감조차 요구하지 않아 비교적 쉽게 워크아웃플랜이 결정될 것으로 전망됐으나 결국 기업구조조정위원회에 회부됐다. 채권금융단이 거평그룹에 대해 자율적인 해결책을 마련하지 못했다는 것은 사정이 더 복잡한 다른 워크아웃 대상기업들의 경우 대부분 기업구조조정위원회에 회부될 수 밖에 없을 것이란 전망을 낳게 하고 있다.
기업구조조정위원회는 채권금융단의 합의형식으로 만들어진 기구지만 실질적으로 금감위의 산하기구로 인식되고 있다. 은행들이 면피성으로 기업정리에 장기간이 소요되는 화의 법정관리 등을 선호, 구조조정이 지연되었던 구태(舊態)를 막기위해 금융당국이 워크아웃을 장려하고 있지만 은행들의 책임회피로 실효를 거두지 못하고 구조조정위원회가 법원을 대신해 모든 것을 결정하는 체제로 변질될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는 것이다.
워크아웃 대상기업들은 감자를 통한 경영권상실을 우려해 적극적인 협조를 꺼리고 있는 것도 워크아웃이 원만히 진행되지 못하고 있는 이유다.
◇어쩔줄 몰라하는 금융감독위원회=금융감독위원회는 은행과 기업들을 독려하고 있지만 소극적인 자세를 반전시키는 방안을 마련하지 못해 전전긍긍하는 입장이다. 금융감독권을 직접 발동, 현장에 나가 일일이 개입하자는 의견도 있으나 「내 코가 석자」인 은행들의 비협조적인 자세와 실물경제붕괴 가능성을 내세우며 저항하는 기업들에 대해 마땅한 대처방안을 마련하지 못하고 있다.【최창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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