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적 구속보다 큰 사회적 약속인 만큼 잘 이행할 것입니다."(정운찬 동반성장위원장)
결국 우려한 일이 터졌다. 일진전기 등 4개 대기업이 '사업철수'라는 동반위의 결정을 무시한 채 '당당하게' 사업을 강행하고 나섰다. 지난해 말 중소기업적합업종을 선정한 뒤 불과 한 달도 안 돼서다. 대기업의 이행 여부에 대한 우려에 "걱정 말라"던 정 위원장의 다짐은 물거품이 됐다. 중소업계는 "지키지도 않을 약속이 무슨 의미가 있느냐"며 "대기업이 동반위의 상생 의지에 찬물을 끼얹고 있다"고 비꼰다. 이런 상황에서 올해 가뜩이나 벅찬 서비스ㆍ유통 부문 중기적합업종 선정이 제대로 진행될지도 의문이다.
◇산산조각 난 중기의 꿈=지난 1월12일 한전에 25.8㎸ 가스절연개폐장치(GIS) 입찰공고가 떴다. 한 중소 전기업체의 A사장은 수주 기대에 부풀었다. 경쟁업체인 대기업이 동반위의 사업철수 권고안을 당연히 받아들일 것이라는 안도에서다. 하지만 입찰 당일인 1월26일 기대는 산산조각 났다. 예상과 달리 일진전기를 비롯해 LS산전ㆍ효성ㆍ현대중공업 등이 모두 입찰에 참여했고 결국 일진전기가 우선협상대상자로 선정됐기 때문이다.
전기조합 관계자는 "선도전기ㆍ광명전기ㆍ동방전기ㆍ파워맥스ㆍ비츠로테크 등 입찰에 참여한 10개 중소기업이 분개하고 있다"며 "사회적 합의를 무시하는 대기업의 장삿속을 보노라니 대ㆍ중기 동반성장의 갈 길이 얼마나 험난한지 실감한다"고 씁쓸해했다.
25.8㎸ 이하 개폐장치 시장 규모는 3,000억원으로 이 중 관수시장 부분은 670억원이다. 지난해 기준 중소기업의 관수시장 점유율은 90%에 달하며 관련 대기업은 4개, 중소기업은 32개다.
◇갈 길 험난한 동반위=동반위의 결정을 대기업이 대놓고 위반하자 동반위는 곤혹스러워 하는 모습이다. 올 초 전국경제인연합회가 GIS에 대해 이의를 제기해도 절차상 문제가 없다며 당당히 맞섰던 동반위로서는 실제로 대기업이 '배째라'고 나오자 동반위의 위상에 흠집이 생길까, 이번 건이 다른 업종으로 확산되지 않을까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전기조합 관계자는 "중소업체 간에 동반위를 못 미더워하는 분위기가 커졌다"며 "대기업이나 중소기업 모두에 외면당하면 동반위가 과연 존속할 수 있겠느냐"고 반문했다. 그는 동반위가 이번 건에 대해 확실한 태도를 보이지 않는다면 예정된 유통ㆍ서비스 중기적합업종 선정이 난항을 겪을 것은 불 보듯 뻔하다고 강조했다.
중기적합업종 법제화도 다시 논란이 일 것으로 전망된다. 그동안 일각에서 동반위의 권고안을 법제화시키자는 주장에 대해 정 위원장은 "대ㆍ중기 간 자율에 맡기는 게 낫다"는 입장이었지만 이번 사태를 통해 국회에 계류 중인 4건의 중기적합업종 법제화 관련 법안이 탄력을 받을 것으로 보인다.
◇대기업 손들까 말까=대기업의 '사회적 합의' 거부에 중소기업과 동반위가 강력 반발하면서 대기업의 향후 행보에 귀추가 주목된다.
동반위는 일단 신고센터에 접수된 이상 사실조사에 착수한 뒤 대기업의 의견을 듣고 시정조치를 내릴 방침이다. 언론에도 공표한다. 만약 대기업이 시정조치를 이행하지 않는다면 중기청 사업조정제로 이관하고 중기청의 사업조정에도 응하지 않는다면 형사고발을 통해 1년 이하의 징역이나 5,000만원 이하의 벌금이 부과된다.
중기중앙회 관계자는 "동반위 권고안이 강제조항이 아닌데다 전경련을 위시한 관련 대기업이 동반위 결정이 불합리하다며 사업 강행 의사를 내비치고 있어 사태 해결이 쉽지 않아 보인다"며 "정부 의지와 여론의 향배에 따라 결론이 날 것 같다"고 내다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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