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말 풀무원 식품은 두부와 콩나물, 어묵 등 10개 제품군의 가격인상을 발표했다가 반나절도 안 돼 이를 철회하는 해프닝을 빚었다. 평균 7%가량의 가격인상이 발표된 직후 불과 10시간도 안 돼 "물가안정에 기여하기 위해 가격인상을 철회하겠다"는 웃지 못할 자료를 내놓은 것이다. 오전 가격인상이 발표된 직후 농림수산식품부 등 정부당국의 압박이 이어지자 결국 백기 투항한 셈이다.
#지난해 국내 식품업계에 프리미엄 열풍을 몰고 왔던 신라면 블랙은 불과 4개월 만에 국내 생산이 전격 중단됐다. 매출부진이 원인이었는데 초반 대박을 터뜨렸던 매출이 급속히 떨어진 데는 공정거래위원회의 힘이 컸다. 공정위는 '신라면 블랙은 라면일 뿐 설명과는 달랐다'는 보도자료를 내놓으며 허위 과장광고에 과징금을 물렸고 농심은 기업 이미지에 타격을 입고 신라면 블랙 사업을 접게 된다.
지난해부터 올해 초까지 정부는 국내 업체들을 대상으로 사실상 '관치물가'를 행사해왔다. 글로벌 금융위기 여파로 금리인상 등 거시정책 수단을 꺼내 들기 힘들어지자 정부 눈치를 안 볼 수 없는 국내 업체에 직ㆍ간접적으로 가격인하를 압박하는 미시적인 정책 수단을 통해 물가 잡기에 나선 것이다.
대표적인 것이 기름 값이다. 지난해 1월 "기름 값이 묘하다"는 이명박 대통령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기획재정부ㆍ공정위ㆍ지식경제부 등 정부 각 부처가 총동원돼 기름 값을 내리라고 정유사를 압박하기 시작했다.
정유사들의 반발이 이어지자 당시 최중경 지경부 장관은 "내가 회계사 자격증을 갖고 있으니 직접 원가를 계산해보겠다"고 협박했고 공정위는 정유사 가격담합 조사라는 칼을 빼 들었다. 이 같은 전방위 압박을 통해서도 기름 값을 못 잡자 하반기에는 알뜰주유소 카드를 꺼내 들며 정부 주도로 직접 민간업체와 가격경쟁을 시작하기에 이르렀다.
정부는 이와 더불어 식탁 물가를 잡기 위해 국내 식품업체들의 가격인상에도 직ㆍ간접적으로 관여하기 시작했다.
공정위가 주도한 '프리미엄 제품과의 전쟁'이 대표적인 사례다. 신라면 블랙 등 라면 값 인상에 제동을 건 데 이어 지난해 중순부터 올해 초까지 우유ㆍ분유ㆍ햄 등 각종 제품에 대한 가격비교 정보를 생산하며 국내 업체들의 프리미엄 상품발(發) 가격인상을 차단했다. 이와 함께 대형 백화점, 대형 마트, 홈쇼핑 등을 대상으로 납품업체에 대한 판매 수수료 인하를 추진해 대형 유통업체들의 유통마진에도 손을 대기 시작했다.
공정위 외에 국세청ㆍ농식품부 등 식품업계와 관련된 규제권을 쥔 주무부처들은 국내 업체들에 보다 직접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하며 가격인상 움직임을 차단하기도 했다.
지난해 말 롯데칠성ㆍ서울우유ㆍ오비맥주 등이 모두 가격 인상안을 발표했다가 불과 수시간, 수일 만에 철회하는 사태가 벌어진 것도 주무부처의 입김이 강하게 작용했기 때문이다.
이 같은 범정부 차원의 종합 대책에도 불구하고 지난해 물가 잡기가 사실상 실패로 돌아가자 정부는 올해 초에는 더 강력한 물가 잡기 정책을 꺼내 들며 국내 업체들을 압박하고 있다.
이 대통령이 연초 물가관리실명제를 주문하며 '배추국장' '쌀국장'을 부활시킨 데 이어 서규용 농식품부 장관은 지난 2일 "물가안정에 협조하지 않는 식품업체에는 할당관세를 적용하지 않겠다"며 으름장을 놓았다.
여기에 윤상직 지경부 차관은 9일 이승한 홈플러스 회장, 최병렬 이마트 사장, 노병용 롯데마트 사장 등 주요 대형 마트 대표들과 간담회를 갖고 생필품 등의 물가안정에 협조해줄 것을 재차 요청할 예정이다. 같은 날 한국은행이 금리를 또다시 동결할 것으로 예상되는 가운데 정부가 거시정책 실패에 따른 물가불안을 국내 업체들을 희생양으로 극복하려 하고 있다는 비판이 거세게 이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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