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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말을 맞아 40대 회사원 이모씨는 요즈음 심정이 착잡하다. 회사에서 구조조정 얘기가 심심치 않게 나오기 때문이다. 그런 얘기를 들어서인지 이씨는 요새 동네 상가에 있는 점포 하나하나를 보는 눈이 달라졌다. 예전에는 아무 생각 없이 지나쳤지만 그런 생각으로 다시 보자 '정말 같은 업종의 가게들이 많구나' 하는 것을 새삼 느낀다. 이씨 아파트단지는 대규모 단지가 아님에도 미용실 3개, 빵집 2개, 호프집이 3개씩이나 있다. 빨래방도 2개 있었으나 최근 이중 한곳이 문을 닫았다. 이씨는 속으로 '이 가게들이 모두 먹고 살 수 있을까'하는 생각을 하곤 한다. 출판계에 종사하던 박모(39)씨는 한달 전 서울 종로구 상가에서 고깃집을 차렸다. 그는 몇 년 전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나온 뒤 대학로에서 삼겹살집을 열었으나 별로 재미를 보지 못하고 권리금ㆍ시설비도 제대로 받지 못한 채 문을 닫았다. 새로운 사업을 찾기 위해 창업 컨설팅회사도 찾아가봤지만 특별한 기술이 없는 박씨로서는 다시 음식점을 차릴 수밖에 없었다. 박씨는 "이번에는 망하더라도 손해를 적게 보기 위해 권리금이 없는 신규 상가에 음식점을 냈다"며 "그러나 같은 층만 해도 음식점이 여러 개여서 부담이 크다"고 말했다. 9일 국세청이 처음으로 조사ㆍ공개한 업종별ㆍ지역별 자영업자 현황에 따르면 전국의 음식점 수는 43만9,223개로 인구 114명당 1개씩이었다. 그동안 짐작으로만 대충 예상하던 과당경쟁의 현황이 최초로 통계에서 드러난 셈이다. 의류점도 8만개가 넘고 부동산중개업소는 7만개, 호프집은 6만개가 넘는다. 의류점은 인구 595명당 1개, 부동산중개업소는 650명당, 호프집은 767명당 1개다. 그럼에도 창업은 음식점ㆍ부동산중개업소ㆍ호프집과 같은 생활밀접 업종으로 몰린다. 국세청 조사에 따르면 지난 한해 동안 창업자 100명 중 35명은 이들 생활밀접 업종으로 창업한 것으로 나타났다. 지난해 전체 창업자 수 92만5,000명 중 32만5,000명이 이에 해당했다. 업종별로 보면 음식점 12만5,000명, 옷가게 2만6,000명, 호프집 2만5,000명, 부동산중개업소가 2만명이었다. 그러나 갈수록 경쟁은 치열해지는 반면 대형마트ㆍ인터넷쇼핑 등의 영향으로 자영업 경기는 위축되고 있다는 게 현장의 목소리다. 면목동에서 10년간 보습학원 운영했던 김모씨는 최근 보습학원이 급증하면서 임대료 낼 형편도 못되자 아예 학원문을 닫고 강사로 뛰고 있다. 재경부의 한 관계자는 "전문성 없는 회사원들이 퇴직하고 재취업할 수 없는 노동시장이 문제"라며 "쉽게 할 수 있는 도소매업ㆍ호프집ㆍ음식점에 몰리다 보니 과당경쟁이 일어나고 퇴출도 많이 이뤄진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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