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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는 귀사의 제품을 얼마나 쓰고 있습니까."
대개 국내 수출기업들은 해외시장 진출에 앞서 이 같은 질문을 받는다. 자국에서 얼마나 인정받고 있는 제품이냐는 의미다.
해외판로를 개척할 때 '트랙레코드(판매실적)'는 기술력과 공급안정성 못지않게 배점이 높은 평가항목이다. 그러나 자국에서 트랙레코드를 쌓을 기회조차 얻지 못했다면 보통 첫 해외진출 때는 가장 중요한 세 항목 중 한 가지가 '0점' 처리된다. 뛰어난 기술력을 갖추고도 불합리한 제도, 기득권층의 이권 다툼 등 숱한 장벽에 국내 실적을 쌓을 기회조차 박탈당한 강소기업 사장들이 가슴을 치는 이유다.
국내 트랙레코드를 쌓지 못하고 있는 코나아이와 관련해 류재일 충남대 컴퓨터공학과 교수는 "오는 2014년이면 연 1억장가량의 전자여권이 새롭게 제조되고 금액으로는 110억달러 규모의 시장을 형성해 연평균 27.5%의 성장률이 예상된다"며 "국내에서도 이미 1,167억원어치의 전자여권 조달이 완료됐지만 모두 외산 제품으로 구성돼 국내 실적이 전무한 국산 제품들이 해외시장에서 경쟁력을 확보할 기회를 얻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행정 편의주의에 좌절="정부가 나서서 자국 기업의 해외진출을 막고 있는데 '월드클래스300'과 같은 상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지난 2011년 5월 산업통상자원부(당시 지식경제부)의 수출기업 육성 프로젝트 '월드클래스300' 수여식에 참여한 조정일 코나아이 부회장이 꾹꾹 눌렀다 내뱉은 말이다. 매출 1,380억원 규모(2012년 연결)의 코나아이는 오는 8월 5차 입찰에도 참여할 방법이 없다.
주관부처인 외교부와 조달 위탁기관인 한국조폐공사가 마련한 전자여권 경쟁입찰 공고에 따르면 각 컨소시엄은 칩과 COS의 중복 없이 서로 다른 두 쌍의 제품을 제안해야 한다. 경쟁사 2곳이 함께 두 종류의 제품조합을 내놓아야 한다는 것.
문제는 중소기업인 코나아이가 손잡을 경쟁기업이 없다는 점이다. 관련 기업 수가 적은데다 삼성전자ㆍLG CNS 등 대기업의 인지도에 밀리기 때문이다. 2008년부터 진행된 1~4차 전자여권 입찰에서 LG CNS는 자체 개발한 COS 대신 젬알토 등 유럽 기업과 협력해 4건의 수주를 모두 따냈다. COS 기술을 보유한 삼성SDS 역시 외국 경쟁사와 협력해 입찰에 참여했다.
조 부회장은 "외교부는 안정적인 공급을 위해 경쟁사가 협력해 입찰에 참여하도록 하고 있지만 오히려 신규 국내 업체의 진입을 막는 장벽이 되고 있다"며 "다른 기업들은 자국에서 트랙레코드를 쌓고 해외로 진출하는데 전자여권 국산화의 핵심인 COS를 개발하고도 입찰에 참여할 기회조차 얻지 못하고 있다"며 분통을 터뜨렸다.
사정이 이렇자 학계는 경쟁사와 컨소시엄을 구성해 입찰하는 방식 대신 상위 1~2위사를 선정하는 식으로 외교부에 입찰방식 변경을 제안하고 있다. 한동국 국민대 수학과 교수는 "기술적인 부문에서 전자여권 국산화는 완료된 상태지만 잘못된 입찰조건과 불투명한 평가절차 등으로 외산 잔치가 이어지고 있다"며 "국내 기업에 특혜를 주라는 것이 아니라 외국산 제품과 동일하게 품질 테스트를 거쳐 선정될 수 있는 기회를 줄 필요가 있다"고 조언했다.
◇낡은 법 못 고쳐 혁신제품이 불법=10년이 넘도록 의료법이 개정되지 않아 원격 헬스케어 등 혁신 의료기기(장비)가 국내에서는 불법제품이 되는 웃지 못할 일도 벌어지고 있다. 박근혜 대통령까지 나서서 창조경제를 위해 이 같은 잘못된 현실을 개선하라고 지시했지만 의사협회 등 기득권 집단의 눈치를 보는 정치권은 아직도 의료법 개정을 '나 몰라라'하고 있다.
장재준 나노엔텍 경영기획팀 부장은 "선진국에 제품을 수출할 때 국내 판매실적을 요구하는 경우가 많은데 국내법상 판매가 안 된다는 변명은 통하지 않는다"며 "체외진단기기에 대한 기초적인 가이드라인조차 없다 보니 국내인증을 받는 데도 오랜 시간과 경비가 들고 이 역시 수출의 발목을 잡는 요소"라고 하소연했다. 국내시장이 창출되지 않은 상태에서 해외시장 진출 효과가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는 얘기다.
현행 의료법은 원격의료에 대해 원격지 의사가 인터넷ㆍ화상통신 등을 활용해 먼 곳에 있는 의사에게 의료지식ㆍ기술을 지원하는 행위로만 한정하고 있다. 하지만 이마저도 보험급여체계에 포함되지 않아 실효성이 떨어지는 상황. 보건복지부는 2010년 18대 국회에 원격의료를 허용하는 내용의 의료법 개정안을 제출했지만 대한의사협회 등의 반대로 계류되다가 자동 폐기됐다.
장 부장은 "2000년대 초반부터 U헬스케어산업에 몸담아오면서 당시만 해도 미국ㆍ유럽ㆍ일본 등 선진국에서 탐방을 올 정도로 기술이나 인프라 면에서 앞서 있었던 한국이 후발주자로 뒤처지는 상황을 지켜봤다"며 "의료법 개정은 고사하고 현행법상 의료인 간 원격진료만이라도 실효성이 생긴다면 큰 수확일 것"이라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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