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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비자물가지수가 연일 하락하면서 한국은행의 물가 전망으로 촉발된 신뢰도 저하가 통화정책 전반으로 전이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한은이 내년의 금융중개지원대출 한도를 많게는 5조원 늘려 돈풀기에 나서기로 한 것을 두고서도 재정정책 여력이 없는 기획재정부를 한은이 지원하는 꼴이라는 지적도 제기되고 있다. 경기 전망과 통화정책이라는 한은의 고유 역할이 '중심'을 잃어버리면서 점차 흐려지고 있다는 얘기다.
한은의 물가 전망은 신뢰에 많은 손상을 입었다. 분기별로 낮추는 것은 당연시됐고 조정 폭도 상당하다. 한은이 지난 1월에 예측한 올해 물가 상승률은 2.3%. 상반기는 1.6%로 예측치(1.7%)와 비슷했지만 8월부터 물가 상승률이 예상보다 크게 둔화됐다. 급기야 10월 '2014~2015 경제 전망'에서 한은은 올해 소비자물가 상승률 전망치를 연초 전망보다 0.9%포인트 낮춘 1.4%로 수정했다. 정성태 LG경제연구원 책임연구원은 "한은의 물가 전망은 1%포인트 이상의 오차를 보이고 있다"면서 "단순히 공급 측 요인을 과소평가했다기보다 글로벌 수요위축에 따른 물가 상승 압력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물가 전망은 경기 전망과 맞물린다. 하반기 경기가 좋아지면서 물가도 오를 것이라는 예측에서 빗나갔다는 얘기가 된다. 당연히 물가와 경기예측이 어긋나면서 통화정책에도 혼란이 왔다. 정부에 끌려다닌다는 인상을 풍길 정도였다. 6월 금융통화위원회에서 기준금리를 동결한 직후 이주열 한은 총재는 "2.50%는 분명히 경기회복을 뒷받침할 만한 기준금리 수준"이라고 강조했다. 하반기 경기회복세가 나타나면 물가 상승 압력이 뒤따르는 것을 고려하면 현재 금리 수준은 충분히 낮다는 얘기다. 그러나 8월 금통위에서 기준금리를 2.25%로 인하한 후 이 총재는 "성장세 회복을 지원하기 위한 결정"이라고 설명했다. 불과 두 달 만에 통화당국의 스탠스가 바뀐 것이다. 10월 금리인하 후에도 비슷했다. 이 총재는 "경제 모멘텀을 살리려면 지금이 인하 시기"라면서도 "2.0%면 경기회복을 뒷받침할 만한 수준"이라고 말했다. 마치 2.0%가 마지노선이라는 인상을 줬지만 이 총재는 기준금리를 2.5%로 동결할 때는 물론 2.25%로 낮출 때도 이런 발언을 반복했다.
전망을 뒤늦게 수정하고 기준금리를 두 차례 인하하면서 경기부양에 드라이브를 거는 모양새 역시 한은이 기재부를 뒤따라가는 인상이 짙다. 한은 스스로 경기상황을 판단한 뒤 결정했다기보다는 정부의 스탠스에 보조를 맞추고 있다는 것이다. 한은이 내년 금융중개지원대출 한도를 많게는 20조원으로 확대하는 방안을 검토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정 책임연구원은 "금융중개지원대출은 1970~1980년대 정부가 특정 산업을 육성하기 위해 마련한 제도로 선진국의 통화당국에는 없는 정책"이라며 "한은이 큰 그림에서 하는 통화정책이 아니라는 점에서 증액은 재정당국의 입김이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한 민간 경제학회장도 "경기상황이 좋지 않고 디플레이션 흐름까지 예측된다면 중앙은행이 모든 수단을 강구할 수는 있다"면서도 "다만 이런 결정을 하는 과정에서 한은 스스로의 판단인지는 그간의 통화정책을 볼 때 의구심이 든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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