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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통업계, 악성 고객에 목소리 낸다

"과잉 친절·저자세가 키운 소비자 갑질 더는 못 참아"

직원에 무리한 희생만 강요해 온 무조건적 고객제일주의에 자성

직원 인권보호 지침 등 새로 마련… 영세업체는 대응책 쉽잖아 고민

한 홈쇼핑업체 콜센터 직원들이 상담 전화를 받고 있다. 콜센터 직원들은 악성 고객들의 언어 폭력에 그대로 노출돼 있다. /서울경제DB

주부 유승연(가명)씨는 최근 대형마트에 장을 보러 갔다가 말로만 듣던 '블랙 컨슈머(악성 소비자)'를 직접 목격했다. 50대 중반의 여성 고객이 서비스 데스크 지원에게 다짜고짜 커피 믹스를 박스 째 집어 던지며 "왜 속여서 파냐"고 소리를 질러댔기 때문이다. 유씨는 "여성 고객이 100개짜리 커피 믹스 세트를 사서 집에 가서 뜯어보니 94개 밖에 들어 있지 않았다고 난동을 부렸고 서비스 데스크 직원들은 갑작스러운 소란에 어쩔 줄 몰라 했다"고 말했다.

최근 '백화점 갑질모녀', '대전 백화점 갑질녀' 등의 추태가 알려지는 등 유통·외식업계를 중심으로 부당한 요구와 직원들에게 폭언·폭력을 일삼는 블랙컨슈머 사건이 잇따라 터지자 유통업계에 만연된 '무조건적 고객 제일주의'가 변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또 다시 나오고 있다. 이로써 회사 측은 '고객은 왕'이라는 모토가 직원들에게 무리한 희생을 강요하는 사측의 '갑질'이 아니냐는 반성과 함께 뒤늦게 블랙컨슈머에 대한 단호한 대응과 직원 인권 보호를 강조하고 나섰다. 하지만 영세 자영업자들은 블랙컨슈머에 대한 대응책을 마련하기가 쉽지 않아 여전히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있는 실정이다.

11일 업계에 따르면 소비자의 '갑질'은 주로 현장 직원들을 대상으로 벌어진다. 백화점업계의 한 관계자는 "2년 전에 구입한 옷을 옷장에서 꺼냈는데 갑자기 마음에 안드니 교환해 달라는 요구도 있었다"며 "직원이 규정에 따라 설명을 하니 고객에게 불친절했다며 해당 직원을 그만 두게 하라고 본사에 수십차례 전화했다"고 말했다. 외식업계의 한 관계자는 "응대 직원의 말투가 거슬린다거나 인사를 90도로 하지 않아 입맛이 떨어졌으니 음식값을 못내겠다는 고객도 있다"고 어려움을 토로했다. 홈쇼핑업계에는 콜센터 직원들을 대상으로 한 전화 폭언 사례가 비일비재하다. 최근 한 홈쇼핑업체가 콜센터 직원 300명을 대상으로 설문 조사를 한 결과 94%가 '폭언 경험이 있다'고 답했다.

일부 블랙컨슈머들은 인터넷 커뮤니티 등에서 민원 제기, 항의 방법을 공유하기까지 한다. 심지어 해외 직구 활성화와 함께 국내 블랙컨슈머들이 해외 인터넷몰을 대상으로 할인 기간이 아닌데도 물건값을 깎아달라고 단체로 동시에 메일을 보내고 콜센터로 항의 전화를 걸면서 한국발 주문을 거부하는 곳까지 등장했을 정도다.

블랙컨슈머들의 '갑질'이 수용할 수 있는 한계를 넘어서고, 일부 직원들은 정신적 고통까지 호소하자 기업들도 속앓이 대신 자세를 바꿔 적극 대응하기 시작했다.

롯데백화점은 매장 최일선에서 근무하는 직원들의 인권 보장을 위해 악성 고객을 대상으로 한 프로그램을 올 들어 더욱 강화했다. 무리한 요구나 폭력적인 행동을 일삼는 고객에게는 한국소비자원이 제시하는 '소비자분쟁해결기준'에 부합한 응대 기준을 도입했고 욕설, 폭언, 기물 파손 등의 행위에 대해서는 전용 상담실로 고객을 유도해 피해를 최소화하는 데 중점을 두고 있다.



이마트는 지난해 10월 대형마트 최초로 고객 대응 매뉴얼을 체계화한 'E-케어(E-care)' 프로그램을 전국 점포에 배포했다. E-케어는 고객의 편의를 최우선으로 배려하되 만에 하나 있을지도 모르는 고객의 폭언과 욕설을 관리자급이 담당하도록 명시했다. 일선 고객담당 직원의 심리적 위축과 스트레스를 조기에 방지하고 선제적으로 악성 고객에 대응할 수 있는 지침을 마련했다는 게 회사 측의 설명이다. 소셜커머스 티몬도 최근 고객응대 프로그램을 대대적으로 개편하고 악성 고객 대응에 관한 지침을 새로 마련했다.

하지만 대기업과 달리 영세 자영업자들의 경우 블랙컨슈머들의 무리한 요구와 협박에 그대로 노출돼 있다. 대기업의 과도한 고객 제일주의에 익숙해진 소비자들이 영세업체와 마주할 땐 목소리를 더 높이기 때문이다.

작은 음식점을 운영 중인 김정미(가명)씨는 남편이 없을 때 건장한 남자 고객이 가게로 들어오면 덜컥 겁부터 난다. 김씨는 "몇 달 전 남자 고객이 우리 가게에서 식사 후 배탈이 나 병원에 입원 치료를 했으니 치료비를 내놓으라고 다른 손님들 앞에서 소란을 피운 적이 있다"며 "영수증도 없고, 무슨 메뉴를 먹었는지도 제대로 말하지 않고 무조건 요구했다"고 말했다.

이은희 인하대 소비자학과 교수는 "그간 기업들이 '고객 감동'을 강조하며 불필요한 과잉 친절을 제공했고 소비자들은 과도한 친절을 별 의문 없이 받아들였다"며 "그 사이 소비자의 부당한 요구와 직원에 대한 인권침해는 묵인되고 인간 존중과 배려의 자세는 반대로 사라졌다"고 지적했다. 이어 "최근 벌어진 일련의 일들을 계기로 기업은 불필요한 사회적 비용을 초래하는 과잉 친절을 줄이고 소비자도 스스로 돌아보는 등 기업과 소비자가 함께 소비 문화를 재점검해야 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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