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 있는 날은 파스 붙일 수 있어서 무릎이 덜 아프고 없는 날은 더 아프지. 그래도 나는 괜찮아. 빚 갚느라 혼자 일하러 다니는 우리 막내아들이 불쌍하지. 공장에서 일하는데 나이가 쉰을 넘으니 벌써 늙었다고 하네. 언제까지 다닐 수 있을지 모르겠어."
서울시 구로구 가리봉동 가리봉 시장 안쪽 골목에 있는 노인 회관. 김봉남(90·가명) 할머니는 아픈 몸을 이야기하다 말고 아들 생각에 눈물짓는다. 아들은 멀리 안양에서 일하고 있고 며느리와 사는 김 할머니는 매일 노인회관에서 점심을 해결한다. 무릎이 아파서 지팡이가 있어도 걷기가 힘들지만 가끔 용돈이 생기면 파스를 사다 붙이는 것이 전부다.
대한민국은 전 세계에서 고령화 속도가 가장 빠르다. 이에 따라 노년층의 의료비 부담도 급속도로 늘고 있다. 국민건강보험에서 65세 이상 진료비가 차지하는 비중은 지난 2000년 17.5%에서 2013년 34.4%로 14년 만에 두 배 늘었다. 2004년 약 5조원대였던 노인 의료비는 10년 만인 2013년 16조4,500억원대로 세 배 뛰었다. 그러나 이런 속도로는 고령화로 인한 의료 수요 증가를 따라가지 못한다. 가장 기본적인 의료복지라고 할 수 있는 국민건강보험의 65세 이상 보장률은 70%에 그친다. 노인장기요양보험은 2010년 기준 6.4%만이 수혜를 입고 있다.
그 결과 65세 이후 예상되는 의료비 9,517만원 중 약 43%인 4,080만원을 노인이 직접 부담한다. 이는 생애 전체 본인 부담 의료비의 64.1%다. 65세 이상이면 은퇴하고 10년 이상 지나 퇴직금도 다 써버릴 나이다. 별다른 소득이 없는 이 시점에 평생 드는 의료비의 3분의2가 몰리는 것이다.
게다가 노인 대부분은 완치되지 않는 만성질환에 기약 없이 의료비를 부담해야 한다. 보건복지부의 노인실태 조사를 보면 세 개 이상의 만성질환을 지닌 노인이 전체의 88.6%다. 그러나 과거처럼 자식이 부모를 부양하는 경우는 줄어들고 있다. 자식세대가 40~50대에 일찍 은퇴하고 부모세대가 80~90대까지 오래 살기 때문에 부양할 여력이 없는 것이다. 이날 기자가 방문한 노인회관의 경우도 전체 15명의 노인 중 74세 할머니가 가장 젊은 축에 속해 점심을 차리고 있었다.
없는 돈에 자식 집에 얹혀사는 게 미안한 김 할머니는 콩을 까서 팔거나 나물을 뜯어 판다. 그러나 노인회관의 다른 사람들과 달리 김 할머니는 기초생활수급자로 인정받지 못했다. "자식이 있으니까 (기초생활수급자가) 안 된대. 약값이랑 병원비랑 너무 비싸." 약값으로 1,000원, 물리치료비로 2,500원만 내면 되는 다른 할머니와 달리 김 할머니는 혈압약값만 해도 부담이 된다.
완전한 빈곤층에 몰리는 경우 기초생활수급자 등으로 인정받아 그나마 의료급여를 지원 받을 수 있다. 하지만 자식이 적게나마 돈을 버는 김 할머니는 의료복지의 사각지대에 놓여 있다. 올해 국민기초생활보장제도를 보면 1인 가구 기준으로 한 달 수입이 60만3,403원 이하면 의료급여 등을 받을 수 있다. 그러나 아들딸, 며느리나 사위가 있고 이들의 소득이 최저생계비의 130%를 넘으면 부양 의무자로 인정되기 때문에 부모는 기초생활수급자가 될 수 없다.
증손녀까지 본 김 할머니는 걱정도 늘었다. "큰손자가 지지배 하나만 낳았는데 돈 든다고 더 못 낳는대. 그 증손녀가 이번에 시집가는데 부모 도움 안 받고 어린이집 교사 해서 번 돈으로 가네." 빠른 고령화와 저출산이 맞물린 우리나라는 다른 나라보다 노인 의료 재정 문제가 더욱 심각하다. 빈곤한 젊은 세대가 빈곤 노인에 대한 의료비 지원까지 반대하는 사태가 생길 수 있는 것이다. 특히 인구의 17%를 차지하는 816만명의 베이비부머(43~51세)가 한꺼번에 노후를 맞이하는 약 15년 후에 노인 의료비로 인한 빈곤화가 몰아칠 수 있다는 우려다.
그러나 국가의 대비는 단단하지 못하다. 노후를 위한 기초자산인 국민연금은 노인 의료비 재원으로 맞지 않다는 지적이다. 국민연금은 보험료를 한 해 넣어서 보험금을 한 해 빼쓰는 구조다. 그러나 노인 의료비는 수십 년의 시차를 두고 수요가 발생한다. 소득은 30대부터 늘기 시작해 60대 이후에 급격히 줄어들고 의료비는 60대 이후 갑자기 증가하기 때문이다. 한 해 모아 한 해 쓰는 구조가 아니라 20~30년씩 구분해 모아놓고 나눠쓰는 제도가 필요한 이유다.
그러나 이 같은 제도를 도입하려면 50대 이하 세대가 노인 의료비를 남의 일로 생각하는 인식이 바뀌어야 한다고 전문가들은 지적한다. 노인과 중년은 물론 그 아래 세대까지 참여하는 노인 의료비 재원조달 방안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노무현 정부가 2030년 국가 청사진을 논의한 '비전 2030'에 참여했던 한 노인복지 전문가는 "기초연금이나 75세 이상 노인 틀니 지원 등 최근 도입한 노인 복지 및 의료 정책이 당장은 돈이 많이 드는 것처럼 보이지만 노인이 사회활동을 할 수 있게 해줌으로써 빈곤이나 범죄로 발생하는 더 큰 사회적 비용을 절감하는 것"이라며 "노인이라고 해서 집에서 부양만 받는 게 아니라 끊임없이 사회·경제적 활동을 할 수 있도록 프로그램을 만들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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