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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어난 평균수명으로 인해 우리 인류에게 주어진 시간은 과연 축복인가, 재앙인가."
고령화로 인한 인구의 변화는 사회의 수많은 분야에 변신을 요구하고 있다. 또 고령화 시대는 우리 삶에 관한 새로운 질문들을 내놓는다. 여러 분야에서 사회나 개인이 준비가 잘 되어 있으면 축복이고, 아니면 재앙이라고 즉각적으로 대답하기에 앞서 시간이 갖고 있는 독특한 특성과 패러독스(역설)에 대해 먼저 생각해보면 어떨까.
사랑하는 사람들과 좋은 곳을 여행하며 한없이 멋진 풍광을 누리고 있을 때, 재미있는 영화나 상황에 몰입하며 빠져있을 때, 승부가 갈리는 순간 손에 땀을 쥐는 스포츠 경기를 관전할 때 우리는 시간이 정지되어 있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행복하고 즐거웠던 경험은 스틸 컷과 같이 한 장면으로 확대돼 기억된다. 하지만 반대의 경우도 있다. 몸이 아파서 간 병원에 길게 줄지어 서 있는 환자들 가운데 내 순서를 기다릴 때, 관공서에서 내 차례를 기다릴 때, 비행기가 연착되거나 차가 막혀서 꼼짝하지 못할 때 우리는 시간이 무한대로 늘어나는 경험을 하게 된다.
인간은 주어진 물리적 시간이 길다고 해도 그 시간을 모두 중요한 의미로 기억하지는 않는다. 우리가 행복해하고 기분이 고조되는 순간에 우리는 시간을 의식하지 않고, 도리어 시간을 의식하기 시작하는 순간부터 우리는 시간의 굴레에 갇히게 된다. 우리의 시간 감각에 가장 영향을 주는 요인이 바로 우리의 집중력이며, 우리가 삶의 내용에 집중하느냐 아니면 흐르는 시간에 집중하느냐에 따라 인식되는 우리의 시간이 역설적으로 달라진다는 것이다.
시간의 역설은 또 있다. '어린이의 시간은 하루가 48시간이고, 어른이 되어 느끼는 하루는 12시간도 안 된다'는 말이 있다. 나이가 흐를수록 가속도의 법칙과도 같이 시간이 더 빨리 흘러간다는 것이다. 과연 어린이와 어른이 보내는 물리적 시간이 다를까. 독일학자들의 연구결과에 의하면 나이가 들수록 시간이 더 빨리 흐르는 것처럼 느껴지는 현상은 기억의 기능, 즉 뇌의 효율성과 연관이 있다고 한다. 뇌에서 저장해야 할 의미 있는 기억은 그대로 저장하고, 단순 반복적이어서 중요도가 떨어지는 기억들은 뇌의 효율성을 위해 압축해 저장한다는 주장이다. 어린 시절에는 모든 것이 새롭고 호기심 어린 대상이다. 처음 유치원이나 학교에 갈 때의 설레임, 친구와 선생님을 만나는 기쁨, 인생의 새로운 것들을 배워가는 즐거움들은 의미 있게 저장되어 평생 어떤 순간에도 떠오르는 추억이 된다. 이는 청년의 시기도 마찬가지이다. 직장생활을 시작하고 사랑하는 사람과 가정을 이루고 하는 일 등이 모두 그럴 것이다. 그러나 그런 기억들이 어른이 되어갈수록 매일 쌓여가는 비슷한 일상으로 채워져 가기 시작하면서 시간은 더욱 압축되어 저장된다. 따라서 뒤돌아 보면 별로 새로울 것 없이 인생이 순식간에 지났다고 여기게 된다는 것이다.
이제 다시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가 보자. 늘어난 시간이 우리에게 축복인지 재앙인지는 시간을 대하는 자세에 달려있다. 시간을 의식하지 않고 삶의 내용에 충실할수록 시간은 좋은 기억들로 우리의 인생을 채워줄 것이다. 또 습관적인 일상에 매몰되지 않고 항상 새로운 도전과 변화를 경험하면 더욱 풍성한 시간을 누리게 된다. 이런 삶을 어찌 재앙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길어졌다고 투덜대는 그 시간이 어떤 사람에게는 그의 인생을 좌우하는 천금 같은 시간이 된다는 역설에 우리는 항상 겸허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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