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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故) 양정모 전 국제그룹 회장은 ‘비운의 기업가’로 불린다. 자수 성가해 일으킨 기업을 하루 아침에 잃은 후 재건을 위해 노력했지만 결국 뜻을 이루지 못하고 세상을 떠난 그의 인생내력 때문이다. 1921년 부산에서 태어난 양 회장은 1947년 부친 양태진 씨가 소유한 정미소 한 켠에서 고무신 공장을 설립했다. 1949년 부친이 국제화학주식회사로 회사 이름을 바꾸고 사장에 취임했지만, 실무 경영은 고인이 도맡았다. 이후 이 회사는 비약적인 성장을 거듭해 1950년대 중반 무렵까지 100개가 넘는 생산라인을 갖춘 세계적 신발 공장으로 성장했다. 사명을 국제신발로 바꾼 뒤 1962년에는 국내 최초로 미국 시장에 진출하는 등 승승 장구했다. 국제신발은 1975년 종합상사로 지정된 후 중화학 업종으로까지 사업영역을 확대하며 공격적인 경영을 펼쳤다. 그 결과 1980년대 중반 당시 국제그룹은 모 기업 국제상사를 비롯해 연합철강공업, 국제종합기계, 국제방직, 조광무역, 성창섬유, 동서증권 등 21개 계열사를 거느린 재계 서열 7위권의 막강한 기업집단에 올랐다. 하지만 부산 사나이가 수 십년 동안 일생을 바쳐 쌓은 공든 탑은 그야말로 한 순간에 무너졌다. 1985년 2월 당시 주거래은행이었던 제일은행이 자금난에 빠진 국제그룹의 정상화 대책을 발표한 뒤 곧바로 그룹 해체 작업에 들어간 것. 국제상사는 한일합섬에, 건설 부문은 극동건설에 매각되는 등 일주일만에 공중분해 됐다. 당시 국제그룹의 무리한 기업 확장, 과도한 단기 자금 의존 등의 내부 문제가 몰락의 원인으로 거론됐지만, 5공화국 군사정부에 밉 보여 ‘부실기업 정리와 산업 합리화’의 미명 아래 희생됐다는 분석이 거의 정설처럼 굳어졌다. 재계에서는 최근까지도 “국제그룹이 재계 7위임에도 마지못해 3개월짜리 어음으로 10억원을 헌금으로 상납했다”, “폭설로 청와대 만찬에 늦게 참석했다” 등 고인과 권력 최고위층 간 껄끄러운 관계를 뒷받침하는 소문들이 지금까지 회자되고 있을 정도다. 심지어 고(故)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은 생전에 한 세미나에서 “국제그룹처럼 기업인이 각고의 노력을 통해 일군 기업을 일거에 분해 시켜 버린 것은 참으로 유감스러운 일”이라며 “경제 정책가들은 그런 일을 다시는 해서는 안되고, 경제계도 다시 그렇게 당해서는 안 된다”고 언급하기도 했다. 고인은 5공화국이 끝나 정권이 바뀌자 국제그룹 해체가 부당하다는 헌법소원을 제기했다. 헌법재판소는 이에 대해 1993년 7월29일 재판관 8인의 다수의견으로 “정부의 공권력 행사가 기업활동 자유와 평등권을 침해했다”며 양 회장의 손을 들어줬다. 모든 의혹이 풀리고 국제그룹 재건의 희망이 보였다. 하지만 산산이 부서진 자신의 기업들을 되찾기에는 너무 늦었다. 한일합섬을 상대로 제기한 주식인도청구소송에서 패소한 것. 정부가 기업활동의 자유를 침해한 것은 사실이지만 이로 인해 개인간의 계약까지 무효가 될 수 없다는 논리였다. 더구나 외환위기를 거치며 신한종금과 동서증권이 문을 닫고, 국제상사와 국제그룹 빌딩 등을 가져간 한일그룹 역시 해체되면서 그나마 실낱같이 남아있던 재기의 희망은 물거품이 됐다. 고인은 이후 뚜렷한 대외 활동 없이 칩거에 들어갔다. 다만 형제인 양규모 KPX 회장, 양귀애 대한전선 명예회장 등 고인의 동생들은 여전히 경영 일선에서 재계의 중추 역할을 맡았다. 유족으로는 장남 양희원 ICC대표와 사위 권영수 LG디스플레이 대표, 이현엽 충남대 교수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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