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 3월 제레미 시겔은 ‘시가총액이 대규모인 기술주에 대한 투자는 바보들이나 하는 모험이다(Big cap tech stocks are a sucker, bet)’라는 제목의 글을 발표했다. 그 속엔 시스코, AOL, 선 마이크로 시스템, 노텔과 인터넷 주식이 급락의 위기에 처해 있다는 섬뜩한 경고가 담겨 있었다. 기술주가 한창 고공행진을 하던 때 그의 얘기에 세상은 코방귀를 뀌었다. 하지만 얼마안가 기술주는 붕괴하고 말았다. 제러미 시겔. 일반 투자자들에겐 다소 낯설지 모르지만 주식 시장 전문가들 사이에선 꽤나 무게 있는 이름이다. 미국 와튼 스쿨 교수 겸 주식 분석가. 장기 투자 포트폴리오의 대가로서 주식 투자 전략 최고 권위자 가운데 하나로 인정 받고 있는 인물이다. 94년 내놓은 ‘주식투자 바이블(Stocks for the Long Run)’에서 그는 “90년대 이후 미국 등 선진국 시장에서 가장 성공을 거둔 전략을 주식투자를 통한 장기 보유였다”며 투자자들에게 기본에 충실한 장기 투자 전략을 추천했다. 10년여 만에 새로 내놓은 신작에서도 그는 정유 및 제조업 등 전통 가치주에 대한 장기투자 예찬론을 펼친다. 시겔은 연구 조사를 통해 1950년대 뉴욕증권거래소에 올려진 상위 20대 기업의 장기 수익률이 새로운 기업과 새로운 산업에 대한 투자 수익률을 초과했다는 결론을 내린다. 그리고 “대다수 투자자들이 기술 혁신을 선도하며 경제 성장을 촉발시키는 기업들이 뛰어난 수익률을 줄 수 있다는 ‘성장의 함정(Growth Trap)’에 빠져 있다”고 경고한다. 그의 결론은 단호하다. “정말로 성공적인 장기 투자는 어려울 게 하나도 없다. 성장의 함정을 피하고 신뢰할만한 기업을 고수하는 것이 과거 투자자들에게 커다란 효과를 주었다. 그리고 그러한 전략이 미래 투자자들에게도 지속적으로 도움이 되지 못할 이유는 전혀 없다.” 대박의 환상을 품으며 겉 모습이 번지르르한 성장주에 투자했다 낭패를 본 투자자들이라면 한번쯤 되새겨볼 만한 충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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