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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가 쌀시장 개방을 또다시 연기할 경우 이를 대가로 들여오는 쌀 의무수입물량(MMA)이 100만톤 수준으로 불어나 쌀산업에 막대한 타격을 입힐 것이라는 분석이 나왔다. 정부는 이에 따라 이르면 다음주 중 쌀시장 개방을 선언하고 쌀산업발전종합대책을 내놓기로 했다. 당초 정부는 세계무역기구(WTO)가 시장 개방 유예를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라는 주장을 펴왔으나 지난 19일 필리핀이 개방 유예협상을 타결하 는데 성공해 막판 변수가 될 것으로 보인다. 일부 농민단체들은 정부가 협상력을 발휘해 MMA 증량을 최소화하면서 시장 개방을 유예할 수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정치권에서도 찬반 의견이 첨예하게 맞서고 있어 시장 개방을 둘러싼 논란이 거세질 것으로 예상된다.
◇정부 시장 개방 공식화=주무부처인 농림축산식품부는 쌀시장 개방을 사실상 공식화했다. 김경규 농식품부 식량정책관은 20일 경기 의왕시 농어촌공사에서 열린 'WTO 쌀 관세화 유예 종료 관련 공청회'에서 "전반적인 쌀소비가 줄어드는 상황에서 MMA를 늘리는 것은 쌀산업에 큰 부담을 안긴다"며 "시장 개방이 불가피하고 향후 자유무역협정(FTA)이나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 등에서 쌀을 양허 제외품목에 포함시키겠다"고 밝혔다.
쌀시장의 빗장을 열 경우 핵심 쟁점은 관세화율이 될 것으로 예상된다. 관세화율은 특정 농산품의 국내외 가격 차를 감안해 시장을 개방하면서 물리는 세율을 의미한다. 이 관세화율이 높아질수록 수입 품목의 가격이 비싸지기 때문에 우리 농민에게는 더 유리하게 작용한다. 쌀을 제외한 다른 품목의 관세화율을 보면 △보리 324% △참깨 630% △고추 270% △인삼 754% 등이다.
정부는 이날 공청회에서 구체적인 관세화율 수준을 제시하지는 않았으나 300~600% 수준의 고관세를 물릴 수 있다는 입장을 보이고 있다. 이 정도 수준이면 수입 쌀의 가격이 충분히 높아져 MMA(올해 기준 40만8,700톤)를 초과해 쌀이 수입될 가능성이 낮다는 분석이다. 한국농촌경제연구원은 원·달러 환율이 1,050원이고 국제 쌀 가격이 톤당 800달러 수준일 경우 수입 쌀 가격과 국내 쌀 가격이 같아지는 관세율은 130%선이 될 것으로 분석했다. 원·달러 환율이 더 떨어지면(원화 강세) 관세화율도 높아져야 균형을 이룰 수 있다.
다만 쌀 관세화율은 우리 정부가 책정하는 것이 아니고 WTO 회원국과 협상을 통해 산정되는 것이기 때문에 이 과정에서 더 낮아질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이날 공청회에 참석한 한 농민은 "정부가 고관세율을 물리겠다고 공언해놓고 실제 낮은 관세가 책정될 수도 있다"고 지적했다. 우리보다 앞서 쌀시장 개방을 선택한 일본과 대만의 사례를 보면 당시 환산치 기준 각각 1,066%, 563%의 관세를 매겨 쌀시장을 보호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대만의 경우 2007년 관세상당치를 합의하기까지 4년6개월 동안 마라톤 협상을 벌이기도 했다.
◇필리핀은 출혈 안고 시장 개방 연기=정부가 쌀시장을 개방을 또다시 연기할 경우 MMA가 늘어나 쌀산업에 도리어 막대한 피해를 입힐 수밖에 없다는 게 정부와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한국처럼 쌀시장 개방을 뒤로 미뤄온 필리핀의 경우 현재 연간 35만톤인 MMA를 80만5,000톤으로 2.3배 늘리는 조건으로 19일 WTO와 시장 개방 유예협상을 타결했다. 이를 우리나라에 대입하면 현재 40만8,700만톤인 MMA가 100만톤으로 늘어나게 되는 셈이다. 이는 우리나라 1년 쌀소비량의 약 20%에 육박하는 막대한 양이다. 충북 쌀 경작지의 2배가 감소할 것이라는 분석도 제기된다. 농식품부의 한 관계자는 "1995년 1인당 106㎏이었던 밥쌀 소비량이 2013년 67㎏으로 줄어드는 등 쌀소비가 급감하고 있는 상황에서 의무적으로 쌀을 무더기로 수입해오면 쌀시장 고사가 불가피하다"고 말했다. 필리핀은 쌀소비에 비해 생산이 부족하고 인근에 태국 등 쌀생산 대국이 있어 출혈을 감수할 수 있었던 것으로 분석된다.
쌀시장 개방을 유예할 경우 MMA 증량은 물론 다른 품목에서 양보를 해야 한다는 것도 문제점으로 지목된다. 필리핀의 경우 미국산 쇠고기 등에 대해 관세를 추가로 인하하는 한편 검역조건을 완화하기로 협의한 것으로 알려졌다. 미국 등 WTO 회원국이 우리나라에도 비슷한 요구를 해올 경우 2차 피해가 발생할 것으로 보인다.
한편으로는 정부가 쌀시장 개방과 같은 첨예한 문제에 대해 충분한 의견수렴을 거치치 못했다는 지적도 나온다. 정부 입장 확정 데드라인인 6월30일을 불과 열흘 앞두고 공청회를 여는 등 제대로 된 토의 과정이 부족했다는 것이다. 농민단체의 한 관계자는 "정부가 6·4지방선거를 염두에 두고 공청회 및 토론 일정을 늦춘 것 아니냐"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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