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장경제의 독버섯으로 불리는 담합. 은밀하게 또는 관행적으로 진행되기 때문에 당사자들마저도 자신들의 행위가 담합이었는지 인식하지 못하기도 한다. 하지만 담합이 가져오는 폐해가 너무 크기 때문에 정황상 담합인 것으로 추정되는 '묵시적 담합'도 담합으로 규정하고 처벌하는 것이 세계 금융 당국의 공통된 추세이기도 하다.
공정거래위원회의 양도성예금증서(CD) 금리 담합 조사 이후 CD 금리 문제가 단순한 관행에서 비롯된 것인지, 실제 금리 조작을 위한 담합이었는지를 놓고 공방이 치열해지고 있다. 금융회사는 CD 금리 산출이 어려워 금리를 일부 협의했을 가능성은 있으나 금리 조작은 없었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그렇다면 공정위는 왜 이 사건을 담합으로 확신하고 있을까. 지금까지의 담합 사건으로 추정해보면 이번 CD 금리 담합 조사는 공정위가 금융회사의 CD 금리 산정 체계를 사실상 묵시적 담합으로 간주하고 정황 증거의 조각을 맞추고 있는 것으로 보는 시각이 유력하다.
명확한 물증이 없는 묵시적 담합이 처벌까지 이어지기 위해서는 두 가지 요건이 성립해야 한다. 하나는 외형적인 일치, 또 하나는 정황증거이다.
이 사건에서 외형적인 일치는 CD 금리 추이를 말한다. 10개 증권사가 고시하는 CD 금리가 시장 금리 변동과 관계없이 장기간 움직이지 않았던 것이 외형적인 일치에 부합된다. 공정위의 한 관계자는 "사업자가 행위가 완전히 일치하지 않더라도 일정한 패턴을 보이거나 행위 속에 법칙이 있다면 외형적 일치로 볼 수 있다"고 말했다.
이 외형적 일치가 묵시적 담합으로 이어지기 위해서는 정황증거가 뒷받침돼야 한다. 헌데 묵시적 담합 사건에서 정황으로 인식되는 증거의 범위는 매우 포괄적이다. 반드시 '담합을 약속했다'는 결정적 증거가 나오지 않아도 된다는 뜻이다.
지난 2002년 공정위가 LGㆍ삼성ㆍ국민ㆍ외환 카드 담합을 제재한 사건이 좋은 사례가 될 수 있다. 당시 4개 카드사는 현금서비스수수료율ㆍ할부판매수수료율ㆍ연체이자율을 공동으로 결정했다며 230억원 규모의 과징금을 맞았는데 어떤 증거에서도 이들이 '담합을 합의했다'는 내용은 나오지 않았다.
다만 이들이 서로 ▦수수료율 정보를 교환하고 ▦타사의 동향에 민감하게 반응하며 ▦사실상 독립적으로 수수료율을 결정하지 않았던 점 등이 정황 증거로 뒷받침됐다. 당시 공정위 전원회의가 내린 의결서를 보면 "업계의 정보 교환은 단순히 동향을 파악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타사와 교류하는 일련의 과정을 거쳐 담합을 완성해나간 것으로 판단된다"고 밝히고 있다.
이를 이번 사건에 적용해보면 10개 증권사, 9개 은행이 서로 담합하기로 명시적 합의를 하지 않았다 할지라도 CD 금리 내용에 대해 주기적으로 정보를 교환했거나 타사의 동향에 발맞춰 자신들의 금리를 고시했다면 충분히 담합의 증거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금융회사들은 물론 금융감독기구까지 일제히 담합 사실을 부정하는 현재의 상황은 이 같은 행위가 담합이 될 수 있다는 사실에 대해 금융권이 너무 무감각하기 때문에 벌어지는 것이라는 지적도 나온다.
공정위의 한 관계자는 "공정위와 별개로 금융감독기구의 통제를 받아온 금융회사는 일반적인 대기업에 비해 담합에 대한 인식이 부족한 것이 사실"이라고 말했다.
다만 공정위가 CD 금리 담합의 정황을 찾아내 묵시적 담합이 있었다고 판단한다 해도 법리적으로는 치열한 공방이 벌어질 것으로 예상된다.
공정거래 소송을 담당하는 대형 로펌의 한 변호사는 "최근 공정위가 묵시적 담합과 관련한 증거들을 포괄적으로 인정하고 있지만 법원에서는 이와 관련해 과연 담합으로 볼 수 있는지 다투는 소송이 빈번하게 벌어지고 있다"며 "금융권이 금융감독원 등의 감독과 묵인 아래 금리 업무를 해온 만큼 이 같은 법리 공방은 더욱 치열해질 수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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