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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일 나의 인생/나춘호 예림당 회장] 3.일자 여인숙
입력2003-04-03 00:00:00
수정
2003.04.03 00:00:00
1967년 3월1일 오후 7시가 넘어 서울역에 내렸다. 해는 떨어지고 어둠이 밀려들고 있었다. 군대 동기인 친구에게 전화를 했다. 집에서 여관을 한다기에 며칠쯤 신세를 질 작정이었다. 그날 밤 잠자리에 들었는데 옆 방에서 들리는 요상한 소리에 잠을 잘 수가 없었다. 뒤늦게 안 일이지만 그 일대가 바로 그 유명한 청량리 588이었다.
더 이상 머물 수가 없었다. 다음날 공군으로 복무하다가 탈영했던 또 다른 친구를 만났다. 휴가 갔다 애인과 떨어져 지낼 수 없다며 귀대하지 않은 친구였다.
그는 청량리 시장 쪽에 있는 일자 여인숙에 애인과 함께 투숙하고 있었다. 나도 일자 여인숙에서 가장 값싼 골방으로 숙소를 옮겼다. 군대에서 사귄 김성린이란 친구를 만났더니 취직은 문제 없다고 했다. 교제비가 필요하다기에 약간의 비상금만 남기고 줬더니 다시는 나타나지 않았다.
“일주일만 먹고 잘 데가 있으면 사는 건 문제 없다.”
내가 늘 가슴에 두고 있는 말이었다. 서울 올 때 적어 왔던 친척이나 고향 사람들의 연락처로 찾아가 만나면 한결같이 `왜 왔느냐? 고향으로 내려가라`는 말뿐이었다. 서울은 나 같은 사람이 살만한 곳이 못 된다는 것이었다. 철학자 키르 케고르는 `절망은 죽음에 이르는 병`이라고 했지만 나에게 있어서 절망은 죽음조차 두려워하지 않는 용기가 되었다. 나는 죽어도 서울서 죽지 고향집으로 내려가지 않겠다는 결심을 더욱 굳혔다.
일자 여인숙은 노점이나 행상을 하는 사람들, 외판원, 이발사, 리어카꾼, 약 장사 등 온갖 뜨내기들의 집합소였다. 모두들 잠만 자고 식사는 각자 해결했다. 대부분 장기 투숙자였지만 숙박비는 매일매일 계산해야 했다.
하루 이틀 지내다 보니 돈은 떨어져가고 취직은커녕 일당 벌이조차 할 수 없었다. 홍릉 부근 노숙자를 위한 급식소에서 5원짜리 국수 한 그릇으로 하루를 보내기도 했고, 호떡 한 개로 하루를 때운 적도 많았다.
막노동하는 곳에 가서 일좀 하자고 해도 거절했다. 모르는 사람 일 시키면 일당보다 비싼 공구를 슬쩍해 가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청량리에서 종로까지는 걸어 다니는 일이 예사였다. 종일 일자리를 찾아 돌아다니다가 배고프고 지친 몸으로 여인숙에 돌아와 누우면 천정이 뱅뱅 돌았다. 이러다가 숙박비마저 못 내서 쫓겨나게 된다면 그야말로 오갈 데 없는 처지가 될까 걱정이 태산 같았다.
어떤 때는 남산에 올라가 서울 시내를 내려보기도 했다. 지금처럼 고층 빌딩이 많지 않아 시내 전체가 한눈에 들어왔다. 다닥다닥 붙은 수많은 집들을 보며 `저 많은 집들 중에 내 몸 하나 누울 방 한 칸이 없구나` 하며 한숨을 쉴 때도 있었다.
여인숙 주인에게는 3학년과 5학년 되는 두 아들이 있었다. 아이들이란 다 그렇듯이 학교에 갔다 와서 책가방 팽개치면 노는 게 일이었다. 학교에 다닐 때 아이들을 가르쳐본 경험이 있던 나는 시간이 날 때마다 한두 시간씩 아이들을 내 방으로 데려와서 공부를 돌봐 주었다.
그 일을 알게 된 주인 내외는 고맙다면서 자기 집에서 제일 큰 방을 나에게 주었다. 아이들을 가르쳐주는 대신 방값은 받지 않겠다고 했다. 뿐만 아니라 이웃집 아이들 두 명을 소개해 줘서 약간의 사례비까지 받게 되었다. 숙박비 때문에 쩔쩔매던 나에게는 참으로 다행한 일이었다.
<아시아태평양출판협회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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