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범인 타 회사 보다 먼저 자수하면 과징금 면제<br>신고 혜택 갈수록 커지지만 주도자는 처벌 안해<br>적발에 효과적 수단 불구 형평성 위배·악용 우려
담합으로 막대한 이익을 챙겼던 A사는 경쟁당국의 조사가 시작됐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고심 끝에 담합사실을 자진 고백하기로 했다. 천문학적 액수의 과징금만 피할 수 있다면 공범인 다른 회사들의 '배신자'라는 비난이 대수는 아니었다. A사의 사내변호사는 월요일 아침 당국의 사무실이 열리기가 무섭게 담합에 관한 증거자료를 들고 사무실로 뛰어들었다. 그러나 그는 허탈하게 돌아설 수밖에 없었다. 이미 다른 공범회사가 전주 금요일 저녁 팩스로 한발 앞서 담합사실을 고백한 것이다.
유럽연합(EU)경쟁당국이 소개했던 '리니언시' 사례다. 리니언시란 담합 사실을 다른 회사보다 먼저 고백하면 과징금을 면제해주는 제도다. 게임이론의 '죄수의 딜레마'를 이용해 고안됐다. 공범이 따로 심문을 받을 때 둘 다 묵비권을 행사하면 낮은 형량을 받을 수 있지만 먼저 자수한 죄수에게는 감형 인센티브를 주고 나머지 한 명은 무겁게 처벌하겠다고 하면 결국 서로 자백하게 되는 원리다. 미국ㆍEU 등 대부분의 선진국에서 시행되고 있으며 우리나라도 지난 1997년부터 도입, 시행되고 있다.
담합사건이 은밀ㆍ치밀해지면서 리니언시제도는 담합 적발에 적극적으로 활용되고 있다.그러나 덩달아 처벌 면제 규모도 커질 수밖에 없어 법적 형평성이 맞지 않는다는 '딜레마'에 직면해 있다.
◇담합 잡는 '리니언시', 갈수록 위력 커져=담합의 특성상 언제나 공범이 있을 수밖에 없고 워낙 은밀하게 진행된다는 점 때문에 담합 사건을 잡아내는 데 리니언시는 효과적이다. 우리나라에서는 1순위 담합 신고자는 과징금을 전액, 2순위 신고자는 50% 감경해주고 있다. 이 때문에 담합의 규모가 크고 과징금이 무거우면 무거울수록 그 위력은 클 수밖에 없다.
최근 들어 담합 사건에 있어서 리니언시의 위력은 더욱 커졌다. 공정거래위원회에 따르면 과징금이 부과된 담합사건 가운데 리니언시의 도움을 받은 사건의 비중은 2005년 33.3%, 2006년 25.9%였으나 2007년과 2008년에는 각각 41.7%와 48.9%로 급증했으며 지난해는 80.1%에 달했다. 이는 올해도 마찬가지다. 6,689억원이라는 사상최대 과징금이 부과됐던 LPG 가격 담합사건, 총 26개의 항공사가 가담했던 국제항공운임 답함 사건 등 올해 적발된 굵직한 담합 사건도 가담 회사들의 자백으로 사건이 마무리됐다.
리니언시의 효과는 담합 적발보다 예방에 효과적이라는 게 공정위의 설명이다. 배신의 댓가가 크면 클수록 배신의 유혹도 커지고 공범자들 사이에서 불신이 싹트게 된다는 것이다. 송상민 공정위 카르텔총괄과장은 "담합에 맞서 싸우는 가장 좋은 수단은 서로를 못 믿게 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형평성 안 맞고, 악용 우려도=그러나 리니언시가 위력을 발휘하면 할수록 부작용에 대한 우려도 커지고 있다. 자백하면 죄질에 관계 없이 처벌하지 않기 때문이다. 심지어 담합을 주도하고 가장 많은 이익을 챙긴 회사도 예외 없이 리니언시의 혜택을 누리고 있다. 이러다 보니 과징금 부과액수가 큰 시장점유율 1위 업체일수록 리니언시를 적극 활용하고 있다. 최근 적발된 시스템에어컨과 TV 공공기관 입찰 담합에서도 시장점유율 1ㆍ2위 사업자는 리니언시를 통해 과징금을 전액 혹은 반액 감경 받았지만 시장점유율이 미미했던 3위 사업자는 법에 정해진 과징금을 고스란히 얻어맞았다.
당국도 리니언시 악용에 대한 우려를 알고는 있지만 현실적인 한계를 이유로 자수한 주도자 처벌에 미온적이다. 주도자에 대해 감면비율을 제한하면 주도자로 판정될 가능성이 있는 사업자들의 자신신고가 크게 줄어들 것이라는 우려에서다. 공정위는 "주도자에 대한 감면제한을 두었던 EU도 2002년 이를 폐지했으며 주도자에 대한 제한이 있는 미국ㆍ독일의 경우도 이를 적용한 사례는 거의 없다"고 강조했다.
다만 공정위는 지난해부터 내ㆍ외부전문가들로 구성된 리니언시 제도 개선 태스크포스(TF)를 구성, 제도 보완책을 마련하고는 있다. 공정위는 "자진신고 지위확인의 주체, 자진신고 이후의 비협조 문제 등와 같은 운영상의 문제점 개선방안을 마련하고 있다"며 "그러나 주도자 처벌에 관한 사항은 제도보완 대상이 아니다"고 못박고 있다.
이 같은 리니언시의 약점은 최근 열린 국정감사에서 여야 의원들로부터 한목소리로 질타를 받았다. 권택기 한나라당 의원은 "담합 사건과 관련해서 자진신고자에게 검찰조사를 면제해주기 때문에 담합주도 회사까지 검찰 고발을 면제 받고 있다"며 제도개선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게다가 공정위가 스스로 담합 증거자료를 찾아내기보다는 리니언시를 활용해 손쉽게 담합 사건을 처리하려는 우를 범할 수도 있다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이에 따라 담합 사건에서 리니언시 효과가 커지면 커질수록 비난 여론도 커질 것으로 예상돼 당국이 리니언시의 딜레마를 어떻게 풀어갈지 주목된다.
◇리니언시(Leniency·담합 자진신고자 감면제)=기업들의담합을 조사하기 위한 방법으로 먼저 담합을 자진신고하는 기업에 대해 과징금을 면제 또는 감면해줘 자진신고를 유도하는 제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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