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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산 탄생 100년] 2부. 성장 이끌고 신화로 남은 캔두이즘 <1> 글로벌 현대차 탄생시킨 '이봐, 해봤어?'

"포드車가 만나주겠나" 망설이자 "해보기나 했어?" 불호령

1967년 현대차 세우고 포드차 국내 조립생산

1977년 미국 압력에도 독자모델 포기 안 해

그의 뚝심 있었기에 지금의 '글로벌4' 존재

1974년 10월 이탈리아 토리노 모터쇼에 출품된 '포니'. 20세기 최고의 디자이너로 불리던 조르제토 주자로가 디자인해 화제가 됐다(왼쪽 사진). 정주영 회장이 서산농장 방문 중에 웅덩이에 빠진 '포니엑셀'을 직원들과 함께 끌어내고 있다(오른쪽 사진). 현대차는 포니엑셀로 미국에서 판매 신화를 썼지만 곧이어 터진 품질 문제로 곤욕을 치러야만 했다. /사진제공=현대차

현대그룹이 건설 사업에 주력하던 1966년. 정주영 회장에게 일생일대의 기회가 찾아왔다. 미국 자동차 회사 포드가 우리나라 진출을 위해 시장조사를 나왔다는 것이다. 정 회장은 "이거다"하고 무릎을 쳤다. 곧바로 포드 측과 만나기 위해 접촉을 시작했다. 하지만 포드는 단칼에 거절했다. 건설사와는 만날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쉽게 물러설 정 회장이 아니었다. 그는 미국 출장 중인 동생 정세영에게 현지에서 포드 측과 만나보라고 주문했다. "포드가 만나주겠느냐"고 버티는 정세영에게 정 회장의 불호령이 떨어졌다. "해보기나 했어?"

현대의 자동차 사업은 그렇게 시작됐다. 울산 미포만에 소나무가 서 있는 사진 한 장과 500원짜리 지폐의 거북선 그림으로 시작한 조선 사업처럼 정 회장은 현대자동차도 맨바닥부터 시작했다. 정 회장의 뚝심이 아니면 불가능했던 일이다.

정 회장은 포드차를 국내에서 조립하기로 하고 이듬해인 1967년에 현대차를 세운다. 1940년 아도서비스라는 수리공장을 잠깐 운영했지만 제대로 된 자동차 산업은 처음이었다.

당시 포드는 조립공장을 건설하는 데 3년은 걸릴 것으로 봤다. 그러나 정 회장은 1년 만에 이를 해치웠다. 공장 부지를 사는 동시에 건물을 짓고 건물을 지으면서 기계설비를 만드는 정주영만의 건설법을 사용했다. 조선소 건설과 배 건조를 동시에 했던 것과 같은 기법인 셈이다.

기쁨도 잠시, 정 회장은 한계를 느꼈다. 조립공장이라지만 수준이 형편없었다. 주요 부품은 모두 수입하고 볼트와 너트 정도만 현대에서 조립하는 상황이었다. 수익도 별로 없었다. '정주영 이봐, 해봤어?'의 저자 박정웅 메이텍인터내셔널 대표는 정 회장의 속내를 이렇게 증언한다.

"우리가 조립생산을 해봤지만 남는 게 별로 없어. 우리가 직접 자동차를 만들어야 한다." 결국 정 회장은 포드와 결별했다. 그리고 독자 모델 개발에 나섰다. 임원들은 불안했다. "정말 차를 만들 수 있을까"라거나 "포드와 협력을 계속했어야 하는데" 같은 걱정이 많았다.

정 회장의 생각은 달랐다. "내게 중요한 것은 가능성이 높은 일을 해서 성공하는 게 아니라 진정으로 원하는 일에 도전해서 이루는 거예요. 나는 자동차 독자개발을 진심으로 원합니다."

정 회장은 거침이 없었다. 1974년 7월에는 연산 5만6,000대 규모의 종합 자동차 공장을 짓기 시작했고 그해 10월에는 이탈리아 토리노 모터쇼에 '포니'를 출품했다. 포니는 모터쇼에서 화제가 됐다. 20세기 최고의 자동차 디자이너로 불리던 이탈리아의 조르제토 주지아로가 디자인을 했기 때문이다.



자신감을 얻은 정 회장은 생산작업에 들어갔다. 그의 목표는 부품 국산화율 90%. 1973년 말부터 1975년 말까지 기술요원 200여명이 해외로 나가 최대 1년까지 기술연수를 받았다. 시련도 많았다. 가격조차 마음대로 매길 수 없었다. 당시 상공부는 포니의 가격을 228만9,200원으로 책정했다. 그러나 경제기획원은 포니의 가격이 높다며 출고 10여일을 앞두고 영업용은 204만7,300원, 자가용은 227만3,270원으로 인하하라고 지시했다.

갖은 간섭과 규제에도 포니는 정말 말처럼 달렸다. 일본 미쓰비시사의 1,238㏄ 엔진을 탑재한 포니는 국내에 '마이카' 열풍을 몰고 왔다. 판매도 제법 괜찮았다. 출시 첫해에 1만대를 팔았다.

희망이 보이던 무렵에 유혹과 압력이 동시에 들어왔다. 1977년 리처드 스나이더 주한 미국대사가 자동차 독자개발을 포기하라고 정 회장을 종용한 것이다. 독자개발 대신 미국 자동차 회사와 제휴할 경우 어마어마한 특혜를 카드로 내밀었다. 하지만 정 회장은 우회적으로 거부했다. 자동차는 국가경제의 피와 같다는 논리였다.

그럼에도 포니는 해외시장에서 경쟁력이 없었다. 아무리 가격을 조정해도 포니의 수출 가격은 4,500달러 수준. 미국에서 팔리는 일본 및 서독산 소형차 가격 2,300달러의 두배가량 됐다. 포니의 첫 수출지가 에콰도르로 결정된 것도 자동차를 자체적으로 만들지 않아 값이 비싼 나라를 선택한 결과다. 가격경쟁력이라는 과제를 던져준 첫 차였다.

그래서 나온 것이 '포니엑셀'. 수출 목적으로 만든 포니엑셀은 8,000달러 수준이었다. 당시 일본 차가 1만2,000달러였다. 처음은 대박이었다. 1986년 17만대를 시작으로 1987년 26만대, 1988년 약 30만대를 팔아치웠다. '포니 신화'가 만들어진 순간이다.

문제는 거기까지가 한계였다는 점. 품질이 나빴던 탓이다. 무게중심 결함으로 주행 시 소음이 너무 컸고 속도계기판 바늘은 저속이나 정차 시 마구 요동쳤다. 이때 만들어진 '현대차=싸구려 차'라는 인식을 극복하는 데는 20년 가까이 걸렸다. 현대차가 1989년 캐나다 퀘벡주 부르몽에 만든 첫 해외생산 공장도 열악한 품질 문제로 1993년 문을 닫았다. 정 회장은 이때 품질의 중요성을 뼈저리게 체험했다.

이후 나온 국민차 '아반떼'와 '쏘나타'는 현대차의 기둥이 됐다. 현대차는 정 회장의 지시 아래 품질 강화에 전력투구했고 '일회용 차'라는 오명을 썼던 현대차는 "싸지만 괜찮은 차"라는 평가를 미국과 유럽 시장에서 받았다.

정 회장이 미국 수출을 시작한 1986년 이후 28년 만인 2014년 현대차는 글로벌 판매 800만대를 달성했다. '글로벌4'의 자리다. 포드의 변변찮은 조립공장에서 시작해 글로벌 업체로 거듭난 것이 현대차다. 물론 글로벌 업체로서 현대차의 도약은 아들 정몽구 현대자동차그룹 회장 시대에 이뤄졌다. 하지만 만약 1966년 아버지 정주영이 지레 겁먹어 포드와의 만남을 주저했다면, 1977년 5월 조선호텔에서 정 회장이 스나이더 주한 미국대사의 압력에 굴복했다면 어땠을까. 글로벌 메이커 현대자동차는 물론 세계 13위의 경제 강국 대한민국은 어쩌면 존재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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