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세기 조선. 조공에 바치는 종이를 만들어 번창하는 한 섬이 있다. 어느 날, 종이를 가득 실은 배가 불에 탄다. 한양에서 수사관 이원규(차승원)이 파견되지만, 그가 섬에 당도한 날부터 닷새간 매일 한 사람씩 참혹하게 살해당한다. 사건은 미궁 속에 빠지고, 섬 사람들은 점점 알 수 없는 광기에 휩싸인다. 4일 개봉하는 영화 ‘혈의 누’는 조선시대를 배경으로 하는 추리 스릴러물. ‘여고괴담’ 이후 발전하지 못했던 국내 공포영화의 새로운 모습을 보여준다. 사건의 실마리를 잡아 용의자를 찾아내는 영화의 흐름은 ‘추리극’이라는 말이 무색하지 않게 한다. 영화의 첫 번째 포인트는 우선 시대적 흐름에 있다. 18세기 조선은 새로운 서구 문물이 들어오기 시작하면서 한반도에 자본주의의 싹이 돋던 시대다. 물자가 풍부하고 부가 탄생하면, 이와 발맞춰 인간의 탐욕도 성장하는 법. 반상의 질서에 금이 가기 시작하고, 천주교도들이 ‘마녀사냥’의 제물이 됐던 시대적 배경은 작품의 소재로서 흥미롭게 다가온다. 또 다른 초점은 액션에 닿아 있다. 피(血)의 눈물(淚)이라는 제목에 걸맞게 영화는 관객들의 눈을 감아버리게 할 정도로 사실적인 살인 장면을 연출해낸다. 두 팔과 다리를 짐승에 묶어 죽이는 이른바 ‘육시’를 비롯해 후반부 제지소 내 도구와 장치를 이용한 살해 시도 등은 사실감을 극대화한다. 연쇄살인을 다루지만 많은 추리극이 그렇듯, 이 영화 역시 범인을 쫓는 데는 그리 큰 관심이 없다. 영화는 이런 끔찍한 일이 일어나게 된 이유를 차분하고도 꼼꼼하게 파헤친다. 작품에서 키워드가 되는 단어는 바로 ‘염치’다. 염치를 아는 사람이 용의자로 몰리고, 염치를 버린 이들이 군중으로 돌변해 마을을 아비규환으로 만들어 버린다. 이들에게 핏빛 빗줄기가 쏟아지지만 그러나 염치를 모르는 이들은 끝내 자신들의 탐욕을 깨닫지 못한다. 코믹 배우로 입지를 다진 차승원이 무리하지 않으면서 진지한 역을 소화해냈다는 점은 영화의 또 다른 발견. 다만 꼼꼼한 영화 구성으로 보는 내내 숨쉴 틈이 없어 보는 이로 하여금 다소 힘에 부치게 한다. ‘번지점프를 하다’로 인상적인 데뷔를 한 김대승 감독의 두 번째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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