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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ㆍ주식도 없는 청빈의 삶… 인재양성 위해선 사재도 물쓰듯

[철강신화 지다 - 인간 박태준]<br>타계직전엔 병원비 내기도 어려울 정도<br>대한중석 1년만에 흑자로… 능력 입증<br>41세에 포철 사장 취임 철강 인생 시작<br>사원주택 건립등 복지에도 남다른 관심



집ㆍ주식도 없는 청빈의 삶… 인재양성 위해선 사재도 물쓰듯 [철강신화 지다 - 인간 박태준]타계직전엔 병원비 내기도 어려울 정도대한중석 1년만에 흑자로… 능력 입증41세에 포철 사장 취임 철강 인생 시작사원주택 건립등 복지에도 남다른 관심 김광수기자 bright@sed.co.kr 일본 미쓰비시는 포항제철이 일류 철강기업으로 성장하는 동안 자사의 설비가 가장 많이 사용된 것에 대한 감사의 표시로 고(故) 박태준 명예회장에게 특별한 선물을 제안했다. 박 명예회장이 해운회사를 설립하면 미쓰비시은행이 돈을 출자해 화물선을 건조하고 화물 알선도 책임지겠으니 그 수익금을 전액 박 명예회장이 관리하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박 명예회장은 이 돈을 개인이 받을 수 없으며 포항공대를 지속적으로 키워나가기 위해 수익금 전액을 장학재단에 들어가게 하는 방안을 강구하겠다고 답했다. 결국 박 명예회장은 '화물선 건조자금은 미쓰비시은행이 좋은 조건으로 융자하고 융자금의 95%를 상환할 때까지는 제3자에게 양도할 수 없다'는 내용으로 겨우 50억원의 포항제철 자금을 들여 거양해운을 만들었다. '장기융자 95% 상환' 조건은 자신이 회사를 떠난 뒤에도 이를 손대지 못하게 하려는 의도였다. 이후 거양해운의 수익금이 포항공대로 들어가는 시스템이 만들어졌다. 박 명예회장의 청렴함과 인재양성에 대한 의지를 엿볼 수 있는 일화다. 이처럼 개인적인 치부(致富)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던 그는 타계 직전 자비로 병원비를 조달하기도 어려울 정도로 청렴한 삶을 살아왔다. 김명전 장례준비위원회 유족 측 대변인(삼정KPMG 부회장)은 13일 "(박 명예회장) 본인 명의로 된 집이나 주식(포스코주식)도 하나도 없다"고 설명했다. 박 명예회장은 포항제철의 신화를 이룩한 '철의 사나이'로 불모지였던 우리나라의 철강산업을 세계 최고 수준으로 이끌었다. 그는 국가 기반을 다진 거물 경제인이자 정치에도 몸담은 4선 국회의원으로 국무총리까지 역임하며 '정치인 박태준'으로의 족적도 뚜렷하게 남겼다. 고인은 1927년 경남 양산 출신이다. 1933년 만 6세의 나이로 모친과 함께 일본으로 건너가 수학했다. 1945년 와세다대 공대 기계공학과에 입학했으나 광복과 함께 얼마 지나지 않아 귀국했다. 이듬해 다시 일본으로 건너갔으나 2학년까지만 학업을 마치고 다시 귀국했다. 1948년 남조선경비사관학교(육사 전신) 6기생을 마친 뒤 한국전쟁 등을 거쳤고 육군대학 5기로 입교해 수석 졸업(1954년)하기도 했다. 부인 장옥자씨를 만난 것도 그 해다. 맞선을 본 지 한 달여 만에 결혼한 그가 부인에게 처음 받은 선물이 경제학 원론 서적이다. 그가 인생에서 경제와 처음 인연을 맺은 순간이다. 군인의 삶을 걷고 있던 박 명예회장은 1961년 5ㆍ16 쿠데타 이후 당시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비서실장으로 발탁됐다. 같은 해 국가재건최고회의 재정경제위원회 상공담당 최고위원으로 임명돼 경제인으로 첫발을 내딛는다. '개발독재'와 '산업화'의 양면을 그리는 대한민국의 성장 드라이브를 주도하는 시발점이 이때다. 박 명예회장은 1963년 6월 한국일보에 연재된 이병철의 '우리가 잘 사는 길'을 읽으며 '1인당 국민소득이 76달러에 불과한 가난한 대한민국을 구제하기 위해서는 과감한 외자 도입에 의한 공업화가 필요하다'는 주장에 뜻을 같이했다. 1963년 박정희가 대통령으로 취임했으나 박태준은 정치에 발을 들이지 않았다. 미국 유학을 준비하던 그는 박정희로부터 대한중석 사장을 맡아달라는 권유를 받았다. 대한중석을 1년 만에 적자에서 흑자로 돌려놓은 박 명예회장은 일본을 오가며 철의 중요성을 느꼈고 종합제철소 건설의 꿈을 키운다. 1968년 4월 포항종합제철주식회사(영문명 POSCO) 사장으로 취임한 그는 철강인으로의 인생을 시작한다. 그의 나이 41세였다. 이후 박 명예회장은 일본 철강업계의 선진기술 도움과 대일 청구권 자금을 받아 포철의 일관제철소 사업을 이끌어 한국 철강산업을 반석 위에 올려놓는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고인은 '철강왕'으로 한국 철강산업의 산증인으로 자리매김한다. 교육에도 관심이 많았던 그는 포항제철을 경영하며 사원 복지에 많은 관심을 기울여 최고 수준의 주택단지를 조성했다. 박 명예회장은 사원 자녀들을 위한 유치원을 포함해 초ㆍ중ㆍ고등학교를 설립했으며 1986년에는 포항공과대학교를 세웠다. 1981년 포철 초대회장에 취임한 그는 전두환 신군부가 등장하면서 정치인으로 옷을 갈아입었다. 김대중-김종필(DJP) 연합을 통해 탄생한 김대중 정부 시절(2000년) 공동정부의 자민련 몫으로 국무총리에까지 올랐다. 박 명예회장은 평소 검소한 생활로도 유명했다. 1974년 가을 관세법 위반혐의로 가택수색이 진행돼 집안 구석구석을 샅샅이 뒤졌지만 아무 것도 나오지 않고 장롱에는 이불과 옷이 전부였으며 금고에는 집문서와 패물 몇 가지, 해외출장의 흔적으로 남은 푼돈만 있었다는 일화가 있다. 박 명예회장은 지난달 9일 병세가 악화돼 입원해 몇 차례 수술을 받으며 회복되는 듯했으나 이달 초 다시 상황이 나빠져 중환자실에서 치료를 받다가 끝내 13일 눈을 감았다. 전문가들은 고인의 사인인 폐질환의 원인으로 석면에 무게를 두고 있다. 고인의 젊은 시절 국내 산업현장에서는 석면이 다량으로 쓰였는데 고인이 워낙 활발한 현장 경영을 펼쳐 석면에 노출됐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는 것이다. '한국의 철강왕' 박태준씨 별세… 그는 누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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