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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일 나의 인생/나춘호 예림당회장] 14.거기 그냥 두시오
입력2003-04-29 00:00:00
수정
2003.04.29 00:00:00
이진우 기자
1974년 새해 첫날도 평소처럼 잠에서 일찍 깼다. 잠시 누워 이런저런 생각을 해 보니 지난해 1월1일 이후에는 일년 만에 처음 쉬어보는 것이었다. 그러나 연휴 3일 동안에는 한해동안 밀고 나갈 계획들을 꼼꼼하게 세우고 점검했다. 월 단위는 물론, 보다 세밀한 계획이 필요하다고 판단되는 일은 주단위까지 수첩에 기록했다.
연휴가 끝나는 대로 우선적으로 할 일은 서점을 돌며 수금하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자금사적이 넉넉하지 못해 수금을 해야 책을 다시 찍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면서도 시급히 해결할 일은 계획된 신간의 자료를 확보하는 것이었다.
좋은 그림책을 출판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질 높고 우수한 자료를 구해야 한다. 그러나졃營척?흑백 TV시대였던 만큼 좋은 컬러 사진을 구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당시 책에 실린 그림은 대부분 외국그림을 복사하거나 그대로 보고 베낀 것이 주류를 이뤘다. 나는 그런 점이 불만이었다. 나는 내가 펴낸 그림책을 본 아이들이 실제 자동차와 기관차를 보면 `내 그림책에 있는 차와 똑같아` 하고 말할 수 있기를 바랐다.
그러나 생각처럼 마음에 드는 자료를 구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 마음먹은 대로 책을 내자면 모델로 하려는 기관차를 정지시켜 놓고 적당한 각도에서 사진처럼 그려야 할 판인데 현실적으로는 불가능한 일이 아닌가.
연휴가 끝난 후 일주일동안 서울시내 서점을 돈 다음 지방출장 길에 나섰다. 정가 300원짜리 책 4종을 10부나 20부씩 보내놓고 한 달도 안돼 수금을 하러 간다는 것 자체가 출장비용마저 건지기 힘든 일이었지만 책을 다시 찍기 위해서는 비용마련이 다급한 상황이었다.
첫날은 천안 대전 전주 김제 이리를 돌고, 둘째 날은 정읍 광주 목포로 갔다. 그러나 모두들 책이 잘 만들어졌다며 축하해 주고, 어떤 서점에서는 책이 다 팔리지 않았는데도 미리 계산해 주었다.
출장을 나선지 사흘째, 열차를 타고 목포에서 순천을 거쳐 진주로 가고 있을 때였다. 문득 객차 출입문 옆 벽에 붙어 있는 달력을 보는 순간 눈이 번쩍 뜨였다. 힘차게 달리고 있는 증기기관차 사진이 선명한 색상으로 붙어 있었다.
`저 사진이야.`
나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하지만 사진을 어떻게 손에 넣을 것인지 그 때부터 또 다른 고민이 시작됐다. 당장 떼어 갖고 싶었지만 열차 안에 붙어 있는 것을 마음대로 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생각다 못해 가까이 앉은 사람들에게 양해를 구하기로 했다.
“어린이그림책 출판을 하고 있는데 저기 걸린 사진이 꼭 필요합니다. 여기저기 알아봤지만 구하지 못해 애가 탔는데 오늘 비로소 발견하게 됐습니다. 여러분이 양해해 주신다면 저 사진을 가져가고 싶은데 어떠신지요?”
몇몇 사람들은 꼭 필요한 사진이라면 잘 활용하라고 격려했다. 얼마나 반갑던지 재빨리 사진을 빼내 둘둘 말아 가방에 넣으려 할 때였다.
건너편 창쪽에 앉았던 한 승객이 “여보시오, 거기 그냥 두시오. 아무리 개인적으로 필요해도 여러 사람들이 보라고 걸어 둔 것인데 가져가면 되겠소?” 하고 나무라는 것이었다. 그 순간 얼마나 부끄럽고 당황스러웠던지 온 몸의 피가 멈추는 듯했다.
“죄송합니다.”
얼굴을 제대로 들지 못한 채 사과를 하고 다시 사진을 펴서 제 자리에 끼워 넣었다. 며칠 후 철도청으로 찾아가니 광고기획사에 가면 구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해 사진을 손에 넣을 수 있었다. 나중에 그 사진은 `차, 비행기, 배`라는 그림책의 기차 모델이 되었다.
<이진우기자 rain@sed.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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