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장하준 영국 케임브리지대학 교수는 “현 정부의 개혁프로그램은 성장도 평등도 가져오지 못했다”며 “우리의 발전단계와 경제환경에 맞는 제2의 도약 모델을 만들어야 할 때”라고 주장했다. 장 교수는 지난 40년간 우리의 경제성과는 놀라움 그 자체였다고 말한다. 지난 60년대 중반부터 90년대 중반까지 우리의 1인당 소득증가율은 연 6%에 달했다. 이는 과거 19세기 산업‘혁명’ 때 서구선진국의 경우가 겨우 1% 가량이었다는 것을 감안하면 아주 뛰어난 성적이라는 설명이다. 또 세금과 복지지출의 이용한 정부의 소득재분배 기능이 약했음에도 불구하고 자본시장, 노동시장 등에 대한 여러 규제가 소득격차를 원천봉쇄, 소득분배도 세계기준으로는 “아주 평등한 편”이었다고 덧붙였다. 하지만 98년 외환위기 이후 모든 것이 변했다. 구조개혁 프로그램의 핵심인 시장원리의 확대가 성장과 분배 모두에 악영향을 미쳤다. 당장의 저성장도 주의해야 하지만 오히려 더 큰 문제는 장기적인 성장능력의 저하라는 것이 그의 우려다. 장 교수는 “투자부진, 성장잠재력의 약화, 일자리 창출의 어려움, 불평등과 빈곤의 증가 등 우리가 안고 있는 문제들의 많은 부분이 외환위기 이후 진행된 구조개혁 프로그램의 귀결”이라고 강조했다. 자본시장이 완전 개방된 상황에서 인수합병이 자유화되고 주주권이 강화되면서 대기업들은 안전위주의 경영전략을 채택하게 되고 여유자금은 투자보다는 자사주 매입이나 고배당을 통한 경영권 방어에 쓰게 됐다. 투기적 소득이 늘어났고 또 노동시장 유연화를 통해 노동자간의 임금격차도 커졌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현재 우리에게 주어진 선택은 경제개혁의 시장주의적 기조를 수정하던지 고도의 불평등을 받아들이던지 둘 중에 하나다. 불평등은 당연히 엄청난 사회적 갈등의 소지를 안고 있다. 장 교수는 “성장을 촉진하고 자본시장 규제를 필두로 규제완화가 지나쳤던 부분은 다시 규제를 강화하는 것이 단기적으로 필요하다”며 “성장부진의 중요한 이유 중 하나가 자본시장 자유화임에 비추어 볼 때 규제완화에 대한 재검토는 성장촉진을 통한 고용창출, 그리고 그를 통한 소득불균등 완화에도 중요하다”고 분명히 했다. 그는 또 “미국식 자본주의는 경제발전의 결과지, 원인이 아니다”라며 “미국에서도 주주자본주의의 논리가 주류가 된 것은 80년대로, 지금은 오히려 장기적 투자를 어렵게 해 국가경쟁력을 저해한다는 평가가 나오고 있는 실정”이라고 덧붙였다. 선진국이 되려면 갈 길이 먼 우리가 이러한 체제를 택한다는 것은 잘못이라는 것이다. 한국의 재벌체제에 대한 ‘공(功)’ ‘과(過)’도 분명히 할 필요가 있다. 외환위기 이후 정부가 재벌의 그룹구조 자체를 유명무실화하는 여러 정책을 취함에 따라 재벌의 폐해가 많이 줄었지만 그 장점도 파괴됐다. “재벌들의 과거행실에 ‘배은망덕’한 점이 있더라도 재벌구조 자체를 파괴해서는 안된다. 지금 재벌개혁의 방향을 계속 밀고 나가면 단기적인 금융자본의 이해관계에 한국의 국민경제를 맡기는 것이 된다.” 재벌구조를 인정해 주되 재벌들로 하여금 자신들의 사회적 채무를 인정하고 주주들뿐만 아니라 모든 국민에게 이로운 경영을 하게 만드는 것이 훨씬 실속 있는 길이라는 얘기다. 그는 “지금처럼 과거 우리의 체제를 무조건 비하하고 우리에게 잘 맞지도 않는 미국식 주주자본주의를 모방하려 하기보다는 과거체제에서 보존ㆍ발전시킬 것이 무엇인가를 잘 생각해 새로운 시스템을 구축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장하준 교수는 ‘사다리 걷어차기’ ‘개혁의 덫’ ‘주식회사 한국의 구조조정’ 등 저서를 통해 미국식 주주자본주의와 이를 모델로 진행된 외환위기 이후 한국 경제의 구조개혁을 비판하며 독자적이고 우리실정에 맞는 시스템 창출을 주장해 왔다.
<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