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18일부터 23일까지 경기도 성남시 서울공항에서 열린 '서울에어쇼 2005'에서는 비행기만큼이나 눈에 띄는 노천 레스토랑이 있었다. 활주로 한 켠에 대형 천막을 설치해 만든 500석 규모의 식당. 천막에는 '아웃백 스테이크 하우스'라는 붉은 색 로고가 선명하게 새겨져 있다. 정인태(50) 아웃백 스테이크 하우스 사장은 이번 에어쇼에 야외 식당을 차린 것은 "맨땅에 헤딩하는 짓"이라고 말했다. 일주일 장사하자고 각종 장비와 인력을 투입했기 때문이다. 서울 시내 특급 호텔을 비롯, 많은 업체들이 포기한 일이었다. 정사장 스스로 무모한 일이라고 인정한 야외식당 영업에서 에어쇼 기간 올린 매출은 1억 5,000만 원. 아웃백스테이크하우스의 올해 매출 목표가 2,280억원 인 것을 감안하면 굳이 안 해도 되는 장사다. 정사장은 이 무모한 도전을 하게 된 이유에 대해 "돈은 안 남았지만 어려울 때의 초심을 잃지 않고 도전하는 데 의미가 있었다"며 "브랜드 노출효과도 좋았고, 구성원들에게는 대통령이 참관하는 대형 행사에서 음식을 서비스했다는 경험과 자부심을 심어줄 수 있어 좋았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누가 너희들 대통령에게 음식 서빙 해봤냐고 묻는다고 치자. 그 때 우리는 해봤다 대답할 수 있다면 얼마나 자랑스런 일이냐"고 되물었다. 지난 96년 아웃백스테이크하우스를 한국에 도입해 9년 만에 패밀리 레스토랑 부문 1위로 올려놓은 정 사장은 "남들 못하는 걸 하는 게 좋다. 나는 무(無)에서 유(有)를 만드는 스타일로 일을 한다"고 말했다. '철가방'이라고 부르는 중국집 배달원부터 시작해 국내 최대의 패밀리레스토랑 사장이 된 지금까지도 도전을 멈추지 않는 정사장으로부터 온 몸으로 체득한 희망의 메시지를 들어봤다. # 철가방도 요령이 있더라
-중국집 배달원을 하셨다면서요. "네 했습니다. 그런데 배달의 생명이 뭔지 알아요. 배달의 생명은 배달을 얼마나 잘 하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그릇을 얼마나 잘 찾아오느냐가 문제입니다. 시간과 동선을 분석해 손님이 다 먹고 내놓은 그릇을 얼마나 신속히 걷어오느냐가 배달 회수를 늘리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거지요" 그릇을 빨리 걷어오는 요령을 터득해 하루 100군데 이상의 배달을 다녔다는 정사장은 부산에서 부잣집 아들로 태어났다. 하지만 군에서 제대한 갑자기 집안이 어려워졌다. 그래서 방학마다 부산으로 내려가 아르바이트를 해야만 했다. -갖은 고생을 다하셨다고 하는데 또 무슨 장사를 해보셨나요. "트럭에 생선을 싣고 다니며 파는 장사도 해봤어요. 생선 장사의 생명은 뭔지 알아요. 다름아닌 날씨더라고요. 맑은 날은 꽃게나 오징어같이 쉽게 상하는 게 잘 팔리고 흐린 날은 고등어나 삼치같이 살이 단단한 생선이 잘 팔립디다. 왜 그러냐고 물으면 딱히 할 말은 없어요. 해보니까 그렇더라고…. 그래서 내가 젊은 시절부터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경험에 대한 믿음을 갖게 됐지. '해보니까 그렇더라'는 말은 해보지 않은 사람은 할 수 없는 말이거든. 그래서 아무리 어려워 보이는 일도 일단 부딪혀보자는 게 사업 철학이요" # 좌절은 변화와 도전의 계기다
-첫 직장이 호텔이셨지요. "81년 롯데호텔에서 직장 생활을 시작했지요. 대학원 공부를 병행하고 싶어서 그랬습니다. 새벽 6시에 출근해 오후 4시에 퇴근하는 웨이터 일을 자원했는데 나중에 매스콤에서 나를 두고 '한국 최초의 석사 웨이터'라고 보도하더군요" 이를 계기로 롯데호텔은 정사장에게 해외 연수의 기회를 제공했고, 그는 88년 호텔의 신규 사업팀 프로젝트 매니저로 일하면서 외국의 패밀리 레스토랑 문화를 공부했다. 그 후 92년 롯데호텔을 떠나 미국계 레스토랑인 T.G.I 프라이데이스의 창립멤버로 일을 시작해 5년만에 임원으로 승진한게 패밀리레스토랑을 경영하게 된 동기가 됐다. -T.G.I에서 일을 하신게 아웃백을 경영하게된 동기가 된거군요. "그렇지요. 미국 아웃백 본사에서 나를 찾아왔어요. 그 이유가 재밌었는데 국내 외식 업체중 코카콜라를 가장 많이 판매한 업소를 찾아온 거 였어요. 콜라를 많이 판 업체라면 당연히 음식도 많이 팔았을 거라는 거지요. '무모한 도전이다' '안정된 직장, 그것도 임원 자리를 박차고 모험을 하느냐'는 만류도 많았습니다. 그래도 퇴직금에 대출금을 보태 마련한 1억 8,000만원을 가지고 어렵게 점포를 하나 둘씩 늘려가는 재미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도중에 일이 터졌어요. IMF외환위기가 온거지요" -고생 많으셨겠어요. 그 때는 정리해고 실업자도 많고 소비가 위축됐을 때 였는데. "높아진 환율로 인한 식자재 비용이 상승하고, 턱없이 올라간 이자비용, 갈수록 적어지는 고객에 어음 만기는 매일 닥쳐오고…. 화장실에서 수돗물을 틀어놓고 직원들 몰래 엉엉 울었습니다. 최선을 다해 노력하면 좋은 결과가 온다는 기대와 신념이 무너진 순간이었어요" -어떻게 어려움을 극복하셨나요. "미국 아웃백 본사의 투자를 이끌어 내 합작회사를 만들었습니다. 당시는 한국에서 외국 자본이 빠져나가는 시점이라 신규 투자를 얻기 위한 설득이 쉽지 않았지요. 그런데 미국 아웃백과의 협상은 30분만에 끝났어요. 1,300만 달러를 투자하겠다는 약속을 받아낸거지요. 그래서 2000년에 탄생한 회사가 ㈜오지정 이오" 이 회사의 대표이사 사장으로 취임한 정사장은 2000년에 8개 점포를 열고 이듬해에 8개 점을 더 오픈 했다. 2002년에는 582억 원 매출을 달성하고, 2003년에는 859억 원 매출을 올렸다. 올해 매출 목표는 2280억원, 현재 점포 수는 70개다. 기록적인 성장을 이뤄낸 셈이다. -지옥에서 천당으로 돌아오신거군요. "지금 말로 하니까 재미있는데, 그 때 고생은 말도 못할 정도였어요. 좌절도 연습할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실패의 경험을 통해 더 큰 위기를 돌파하는 방법을 배우는 거죠. 좌절은 변화와 도전의 계기가 될 수 있는 겁니다" # 성공하려면 마음을 바꿔라
정 사장은 최근의 취업난과 청년 실업에 대해서도 한 마디 했다. 인기 있는 직업으로만 사람들이 몰리기 때문에 취업난이 발생한다는 것이다. -어떻게 해야 실업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까요. "어차피 대학 레벨이 가려지는 세상입니다. 그렇지만 좋은 대학 못나왔다고 해서 꼴찌는 아니잖아요. 눈높이를 낮춰보세요. 특정 분야의 1인자가 되는 게 더 빠릅니다. 우리 회사의 매니저들도 일류 회사만 고집했다면 지금과 같은 성공을 거두지 못했을 겁니다" 실제로 아웃백 스테이크 하우스의 매니징 파트너(점장급) 70명 중 3분의 1 이상이 1억 원 이상의 연봉을 받는다. 70명의 평균 연봉은 8,000만 원 정도. 입사 후 서빙부터 시작해 5년만에, 28살의 나이에 억대 연봉의 꿈을 이룬 사람도 있다. 정 사장은 졸지에 직장을 잃고 거리에 나온 사람들에게도 하고 싶은 말이 많아 보였다. -직장을 못찾고 있는 젊은이들에게 한 말씀 해주시죠. "직장생활이 아니더라도 밥 먹고 살 방법이 내 눈엔 많아 보입니다. 그리고 새로운 분야에 뛰어들 때는 새로운 정신과 새로운 노력을 기울여야 합니다. 확실한 것은 옛날 생각하고 손에 물 묻히기 싫어하는 사람은 또다시 실패할 수밖에 없습니다. 특히 퇴직 후 음식장사를 하려고 하는 사람들은 베푸는 덕을 가져야 합니다. 손님에게 주는 것을 아까워하지 말아야죠. 손님이 '이래도 망하지 않느냐'고 걱정할 정도로 퍼줘야 합니다. 식당은 퍼줘서 망하는 게 아니라 손님이 안 와서 망하거든요" 정 사장은 마지막으로 성공하고 싶은 사람들은 긍정적으로 생각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꼬인 마음으로 보면 모두가 적이고 나쁜 사람입니다. 물론 부모 잘 만나서 부자가 되고 CEO가 된 사람도 있어요. 하지만 대부분은 긍정적인 방식으로 삶을 일궈온 사람들입니다. 노력하면 표시가 납디다. 그게 세상 아닙니까. 그래서 모두가 '나도 될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질 수 있는 거고…. 이게 우리가 가야 할 길 아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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