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6년作 '칠수와 만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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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광원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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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석만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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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인수 연우무대 극장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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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빙 앤 조이] '왕의 남자' '살인의 추억'의 본적지를 아세요?
극단 연우무대
우현석
기자 hnskwoo@sed.co.kr
그래픽=이근길기자
86년作 '칠수와 만수'
김광원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교수
김석만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교수
유인수 연우무대 극장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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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의 남자’ ‘살인의 추억’의 본적지를 아세요?
극단 ‘연우무대’
영화 ‘왕의 남자’의 입장 관객이 지난 11일 1,000만 명을 돌파했다.
2003년에는 570만 명으로 최대 흥행기록을 세운 ‘살인의 추억’이 세간의 화제를 불러 모았다.
88년엔 백상예술대상, 대종상을 휩쓴 ‘칠수와 만수’가 장안의 지가를 드높였다.
이들 3편의 영화가 잉태된 곳은 혜화동 파출소 골목의 지하 연극무대다.
개봉과 함께 사회적 반향을 일으키며 관객몰이에 성공한 이 세편의 작품은 ‘연우무대’라는 같은 주소지를 본적지로 두고 있는 피붙이 들인 셈이다.
이들 세 작품중 ‘왕의 남자’는 2000년 공연된 연극 ‘이’(爾)를, ‘살인의 추억’은 96년작 ‘날 보러와요’를, ‘칠수와 만수’는 96년 초연됐던 같은 이름의 연극을 영화한 것들이다.
이 같은 내막을 알고 보면 연우무대의 각본으로 만든 영화는 풍부한 작품성과 그에 뒤지지는 않는 흥행성을 겸비한 셈이다.
실제로 지난 70~90년대 연우무대가 정치적 격변기속에서 무대에 올린 작품들은 때 마다 사회적 반향을 일으키며 대학생을 중심으로 한 식자층 관객들을 객석으로 불러 모았다.
이 극단은 지난 78년 김광림 작, 정한룡 연출의 ‘아침에는 늘 혼자예요’를 선보인 후, 85년 ‘한씨연대기’, 86년 ‘칠수와 만수’, 88년 ‘변방에 우짖는 새’와 ‘4월9일’을, 96년에는 ‘날 보러 와요’, 2000년에 ‘이’(爾)를 선보이며 정통 창작극의 맥을 이어왔다.
특히 연우는 오태석 대표를 구심점으로 일사불란하게 움직여 온 극단 ‘목화’와는 달리 정한룡, 김광림, 이상우, 김석만, 임진택, 오종우, 김민기 등이 각자의 개성을 발산하는 와중에도 치열한 풍자와 실험정신으로 성가를 높였다.
하지만 검열과 간섭의 날을 세우던 군사정권이 종식 된 90년대 들어 연우가 채색해 온 고유의 색깔은 다른 극단들이 들고 나온 창작과 풍자의 물결에 희석되기 시작했다.
정체성과 새로운 좌표를 설립하기 위한 고뇌의 시작이었다.
설상가상으로 2000년대 들어서며 정통 연극계는 다양한 엔터테인먼트로 무장한 뮤지컬이라는 태풍과 맞닥뜨리게 됐다. 고난의 세월을 맨 주먹으로 맞서온 ‘올드 보이’가 음악과 춤, 볼거리로 무장한 새로운 경쟁자와 조우하게 된 것이다.
이제 내년이면 서른살이 되는 연우무대는 살벌한 서바이벌의 무대로 발을 들여 놓았다.
이 기사는 척박했던 이 땅에 공연문화의 씨를 뿌리고 ‘달라진 전장’으로 향하는 청년 ‘연우무대’의 발자취를 조명한 글이다.
실험정신 충만한 창작극 고집
서울대 문리대 출신 중심 연극모임이 시발
군사정권 검열에 풍자·비판·냉소로 맞서
# 연우무대의 태동
연우무대의 출발점은 서울대 문리대 출신들의 학생 연극활동이었다.
76년 겨울 서울대학교 문리대를 졸업하고 직장생활을 하던 정한룡은 가정대 여학생들이 무대에 올린 연극의 연출을 맡았다.
연극이 끝나고 난 후 가정대 여학생들이 연출료를 만들어 가지고 와서 내민 돈으로 목요모임 (77년 2월 5일)을 만든게 창립일이 됐다.
연극이 괜찮았는지 인문대 등 여러 단과대 출신들이 자연스레 모여들었다. 3학년 이상 재학생부터 졸업생까지 어울렸는데 미국의 연극평론가 에릭 벤트리의 책을 놓고 6개월간 스터디를 했다.
스터디가 끝난 후 쏟았던 열정이 아까워 극단을 만들어 보자고 하는 분위기가 자연스레 형성됐다. 후일 연우무대에서 연출을 맡은 이상우가 '연극을 하는 친구들'이라는 의미로 "연우가 어떠냐"는 제안을 했다.
연우의 로고(그림)는 극작가로 이름을 날리게 되는 김광림이 연필로 끄적거려서 만들어 냈다. 이 그림은 세상을 보는 눈이라는 의미도 담겨있었다. 당시 이상우가 광고회사 카피라이터로 일했는데, 그가 지우개를 칼로 깎아 로고를 완성시켰다.
# 치열했던 작품 활동
연우무대는 70~80년대 숨막히던 현실에 메스를 들이대는 듯한 창작극을 잇따라 무대에 올렸다.
이 같은 현실 풍자와 창작은 의도했건 안했건 당시 연우무대가 지향했던 작품세계 였던 셈이다.
특히 연우의 족적(足適)은 시작할 때부터 창작극을 고집했다는 점에서 뚜렷하다.
정한룡대표는 "창단 당시 우리가 창작극만 하겠다고 했더니 선배들은 우리보고 미친놈이라고 하더라"며 "하지만 생각해보라. 90년대에는 창작극이 대학로를 풍미했고, 그것은 아마추어적이었지만 치열한 실험정신의 소산이었다"고 강조했다.
79년 5월 공연된 '우리들의 저승'의 각본을 썼던 김광림은 당시 발행된 팸플릿에서 "쉬운 방법으로 연극을 하고 싶은 마음이 꿈틀댈 때 마다 다짐한다. 방향 감각을 잃은 연극의 홍수 속에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 떨쳐버릴 수 없는 현실을 두고 무슨 연극을 해야 하는가. 번역극 속에서도 우리의 이야기를 끄집어 낼 수는 있다. 그러나 못생겼을지라도 우리 주변에서 늘 보는 얼굴들에 우리는 좀 더 애정을 갖는 것이다"라고 썼다.
작품 마다 넘실댔던 비판과 풍자는 작정하고 한 것은 아니었지만 당시 시대상황에 휩쓸리고 현실을 비틀어 대다 보니, 연우 특유의 스타일로 꽃 핀 경우다. 그런 식으로 관객들과 관계가 형성되더니 마니아 층이 형성됐고, 일부에서는 "연우무대의 관객은 교회에 헌금 내러 오듯 찾아오는 사람들"이라는 얘기 마저 돌았다.
# 검열을 비웃은 공연
이 같은 비판 정신은 마당극을 하다가 들어 온 운동권 출신들에게 영향을 받았다.
정대표는 "운동권 출신들은 기존 연극 배우들과는 생각의 편차가 심해 갈등을 빚기도 했다"며 "하지만 모두들 어떤 연극을 하겠다고 깃발을 휘두르기 보다는 싸우더라도 술 한잔으로 풀어버리고 그 다음날 만나 작품을 할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어나갔다. 그래서 관객들 눈에 비친 연우의 이미지와 진면목은 다른 부분이 있다"고 말했다.
진면목이야 어쨌건 당시 서슬 퍼렇던 공연윤리위원회(이하 공윤위)는 연우의 냉소를 묵과하지 않았다.
공윤위는 모든 공연의 각본을 사전 심사했다. 공윤위는 서울대학교 문리대의 언더그라운드 출신들이 연극을 한다고 하니까 처음부터 비딱하게 보고 검열의 눈초리를 번득였다. 덕분에 초기작 중에는 그대로 통과된 것이 없었다. 일부수정, 개작, 제목수정은 물론 반려된 작품도 있었다.
검열을 피하기 위해 검열대본과 공연대본을 따로 만들기도 했다.
일부에서는 알음알음으로 관객을 모아 공연하는 언더그라운드 방식을 택하자는 의견도 제기 됐지만 정한룡의 반대로 무산됐다. 자기의 색깔대로 연극을 만들고 싶은 단원들(박인배 등)은 연우를 뛰쳐나가 민예총 등에서 활약하게 된다.
하지만 공윤위의 이 같은 압박은 결과적으로 연우의 분위기를 냉소적으로 만들어 갔다.
마침내 공윤위는 실연(實演)심사를 나오기 시작했고 연극은 더욱 비틀어져 갔다.
이 같은 경향은 다른 극단에도 영향을 미쳤다. 군사독재가 끝난 89년 부터 다른 극단들도 너나 없이 연우의 풍자를 따라하기 시작했다. 연우의 차별화는 희석됐고, 고유의 색깔 마저도 퇴색하는 듯 했다. 마침내 새로운 좌표를 찾기 위한 연우의 고민이 시작된 것이다.
70~80년대 소극장 운동 주도
칠수와 만수·날보러 와요 등 사회적 반향 속 연출가·배우 잇따라 독립… 정체성 고민
# 연우의 족적
연우무대가 공연 문화에 끼친 영향을 당대에 가늠하기란 쉽지 않다.
정한룡 대표도 "이 부분은 우리 입으로 말할 수 있는 성질이 아니다"라며 "30주년을 맞아 평론가들에게 평가 받아 보고 싶다"말했다.
하지만 기자의 잇따른 질문에 정대표는 "사회에 대한 풍자정신과 비판적 시각을 꼽을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또 "소극장 운동은 우리가 처음 시작한 것은 아니지만 소극장 특유의 공연 형태(좁은공간, 1인 다역, 마당극 요소의 가미)를 도입한 것을 나름대로의 성과로 내세울 수 있다"고 밝혔다.
이밖에 연출가가 구심점이 된 연극을 처음으로 선보였다는 점도 빼놓을 수 없다.
당시에는 공연할 창작품이 없었기 때문에 소설을 각색한다든지, 누가 써온 것을 토대로 공동창작을 해서 작품을 만들어낼 수 밖에 없었다. 연습을 통해서 작품을 만들어내는 과정은 자연스레 연출가 중심의 극을 창출해냈다.
연출자와 배우들은 아이디어를 짜내기 위해 열띤 토론을 벌이곤 했는데, '변방에 우짖는 새'에 출연하기 위해 참가했던 배우 이호성은 "무슨 배우들이 연습은 안하고 맨날 토론만 하느냐"고 타박하기도 했다.
가식에 찬 발성과 대사를 제일 먼저 집어 던진 것도 연우였다.
번역극에서는 그런대로 들어줄 만 하던 가식적 발성은 창작극에서는 왠지 모르게 겉돌았기 때문이다. 이 같은 실험은 트렌드가 됐고, 이제는 번역극에도 가식적인 발성이 사라진지 오래다.
하지만 무엇 보다 연극 팬들이 연우를 기억하는 첫 번째 이유는 시대를 풍미한 수작들 때문이다. 85년 김석만은 황석영 원작의 '한씨연대기'를 각색ㆍ연출해 주목을 받았고, 이어 86년에는 '칠수와 만수'가 평단을 달궜다. 88년에는 황지우의 시집 '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를 연극으로 만들어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하기도 했다.
# 난관과 가능성
하지만 연우무대의 호기심과 실험정신이 전방위에 걸친 것은 아니었다. 정통 연극에 집착하는 보수적 성향은 연우의 또 다른 내면이었다.
일견 호기심 많고, 당돌하기만 한 것 같던 연우는 뮤지컬에 관한 한 수줍음을 탔다.
정대표는 이에 대해 "그냥 막연하지만 뮤지컬은 연극이 아니고, 상업성에 기반을 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것은 우리의 몫이 아니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게 사실이다. 하지만 요새는 너도나도 뮤지컬을 하니까 우리도 할 수 있지 않느냐는 분위기가 형성됐다"고 말했다. 그 같은 고민 속에서 연우무대는 작년말 뮤지컬 '당신이 잠든 사이'를 무대에 올렸다. 정대표는 "뮤지컬을 해보니 해볼 만 하다는 생각도 들었다"며 "그래서 내년에 치를 30주년 행사 중에 뮤지컬 '칠수와 만수'를 무대에 올려볼까 하는 생각도 하고 있다"고 말했다.
연우의 직면한 또 다른 한계는 변해 버린 관객의 취향과 단원의 이탈이었다.
90년대 들어오면서 연극의 관객 층은 두터워 졌지만 마니아 층은 오히려 줄어들었다.
상업적이고 대중적인 작품에는 관객들이 구름 처럼 모여들어도 정통 연극을 고집하는 극단들은 어려움을 면치 못하고 있다.
정대표는 "관객의 연극에 대한 생각들이 바뀌고 있다. 하지만 우리는 우리가 처음 내세운 것을 지켜오고 있다. 나름대로의 자존심을 지키고 있는 것이다. 내가 처음 연극을 시작한 후 깨지지 않는게 있는데 연극을 보러 오는 관객이 20대와 여볕湧繭遮?것이다. 하지만 그들을 겨냥하다 보면 지속적인 변화를 모색하게 된다. 그런 성향은 중견에 대한 가치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한계도 동시에 가지고 있다"고 말했다.
인재들의 분가(分家)도 어려움 중의 하나다.
정대표는 "재능있는 인재들 중 빠져나가는 인물들이 많다. 언젠가는 연말에 주목할 만한 공연을 꼽는데 전부 연우출신들의 작품이었다. '종가집은 뭐하고 있냐'는 소리를 듣기도 했다"며"이 같은 분화(分化)때문에 연우무대에는 힘이 축적될 겨를이 없다"고 밝혔다.
하지만 젊은 배우들의 시각은 다소 차이가 난다.
연극 '날보러 와요'와 영화 '살인의 추억'으로 주목을 받는 배우 류태호는 "이제는 시대상황이 바뀌어 아마도 연우무대 같은 극단을 다시 보기는 힘들 것"이라며 "연우는 극단이라기 보다는 문화공동체에 가까웠다. 연우에서 분가해 나간 인물들을 보라. 김민기에서 송강호에 이르는 면면은 연우의 진면목을 보여준다. 연우는 예전에도 훌륭했지만 지금도 훌륭하다"고 말했다.
지난 6일 창단 29년 기념 '홈커밍데이'에서 만난 연우무대 창단 멤버이자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 극작과 김광림 교수는 "우리는 연우라는 이름으로 이미 큰 역할을 해냈다. 사람이 태어나서 살다가 생을 마감하듯이 극단도 영원할 수는 없을 것"이라며 연우무대가 처한 어려움을 시인했다.
하지만 그는 "오늘 처럼 연우가 배출한 인재들이 우리 극단을 고향 처럼 생각하고 모일 수 있는 것만 해도 기쁜 일이 아니냐"며 지난 날의 영광을 기꺼워 했다.
입력시간 : 2006/02/15 1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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