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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환 당국이 투기세력에 대한 선전포고에 나섰다. 시장에 쏠림현상이 나타날 경우 선제적인 대응에 나서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지난해 10월24일 기획재정부와 한국은행이 5년 만에 공동 개입에 나선 후 가장 강도 높은 발언이다.
연말 연초 원·엔 환율이 100엔당 1,000원 아래로 급락할 때만 해도 "예의주시하고 있다"는 원론적 수준의 구두 개입에만 나섰던 정부다. 며칠 새 분위기가 완전히 바뀌었다. 외환시장의 한 관계자는 "연초에는 엔저 때문에 환율이 아래쪽으로 쏠리더니 최근에는 금리동결을 99% 예상하면서도 골드만삭스 금리 인상 보고서에 위쪽 쏠림이 심했다"며 "미국 테이퍼링(양적완화 축소) 속도에 따라 외환시장 변동성이 확대될 가능성을 차단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양방향 리스크가 열린 상황에서 예민해진 외환시장을 다잡기 위한 엄포라는 해석이다.
◇"대내외 여건 평안하지 않다"=추경호 기재부 차관은 10일 서울 은행회관에서 열린 거시경제금융회의에서 "외환시장의 대내외 여건이 평온하지 않다"고 평가했다. 그는 "지난해 후반부터 지속된 일방적 시장 심리가 최근 들어 조금 완화됐지만 미국 양적완화 축소, 엔저 심화 등 대외 요인과 외국인 자본 유출입, 경상수지 등 수급 요인을 감안할 때 양방향으로 변동성이 확대될 가능성이 여전히 존재한다"고 말했다.
미국이 지난해 12월 테이퍼링을 결정하면서 미국 통화정책에 따른 불확실성은 상당 부문 완화된 상태다. 하지만 최근 미국 자산시장의 거품 위험이 지적되고 고용지표가 호조를 보일 가능성이 높아지면서 테이퍼링에 속도가 붙을 것이라는 전망도 나오고 있다. 급격한 테이퍼링은 신흥국 금융시장에 직격탄이 될 수 있다. 특히 태국·터키 등 일부 국가의 경우 정정 불안이 경기 둔화와 금융지표 악화로 이어지면서 긴장감이 높아지고 있다.
일본이 4월 소비세 인상을 앞두고 양적완화 기조를 유지할 것이라는 전망도 우리 경제엔 불확실성으로 작용하고 있다. 숨 고르기에 들어간 엔화 약세에 속도가 붙을 경우 한국기업 실적에 대한 우려가 불거지면서 외국인의 금융시장 이탈이 다시 전개될 수 있다.
◇통화정책 빠진 대응 효과적일까=한국은행이 9일 기준금리를 연 2.5%로 동결하면서 통화정책의 환율방어 기능은 사실상 기대할 수 없게 됐다. 정부가 강력한 개입 의지를 표명한 것이 고육지책이라는 말이 나오는 것도 이 때문이다. 그러나 대규모 경상수지 흑자로 달러 공급이 이어지는 상황에서 하단을 받치기는 쉬워 보이지 않는다. 이날 외환 당국의 발언에 환율은 1,063원대에서 1,065원대로 올랐지만 다시 하락세로 돌아섰고 결국 1원50전 내린 1,061원40전에 마감했다.
문제는 방향성 없이 변동이 커진 장세에 외국인 투기세력이 꼬일 수 있다는 점이다. 대규모 자본을 끌어와 환 베팅하는 투기세력으로 시장 불확실성이 더 높아질 경우 외환 당국의 개입도 효과를 보기 어려울 수 있다.
정부의 지지선이 '1,050선'에서 '1,060선'으로 상향 조정된 것일 수 있다는 해석도 나온다. 원·엔 재정환율 하락이 그만큼 부담스럽기 때문이다. 재정환율에 직접 개입할 수 없는 만큼 원·달러 환율을 올려놓는 간접적인 방식을 써야 한다. 전승지 삼성선물 연구원은 "정부가 1,050원에서 1,060원으로 지지선을 올린 것으로 보인다"며 "이 때문에 시장이 더 예민하게 반응할 수도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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