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석유화학 업계를 겨냥해 가격 인하를 압박하고 나서면서 관련 업계가 '시장 논리에 맞지 않는 개입'이라며 강력 반발하고 있다. 특히 업계의 현실을 제대로 파악하지 않은 채 인기영합 차원에서 업계 옥죄기에만 나서는 것 아니냐는 지적이다.
정유 업계의 한 관계자는 9일 "정유 업계는 이미 인하된 국제 제품가격을 국내 공급 가격에 적극 반영하고 있으며 가격이 떨어지지 않는 것은 유류세 때문"이라며 "이를 도외시한 채 가격을 내리라는 것은 어불성설"이라고 불만을 토로했다. 정유 업계와 한국석유공사에 따르면 지난해 말 환율을 감안한 국제 휘발유 가격은 ℓ당 455.2원으로 연초보다 327.5원 감소했지만 정유사의 세전 휘발유 가격은 877.1원에서 541.4원으로 335.7원이나 떨어졌다. 국제유가의 인하폭보다 국내 휘발유 값의 하락폭이 더 컸다는 의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유소의 휘발유 판매가가 크게 떨어지지 않은 원인은 정부가 정한 유류세 때문으로 이로 인해 같은 기간 동안 주유소 판매가는 1,887.6원에서 1,594.9원으로 인하된 데 그쳤다. 국내 주유소 판매가는 고정세율이 적용되기 때문에 휘발유 판매가에서 세금이 차지하는 비중은 지난해 1월 49%에서 12월 말 56%까지 치솟았다. 정유 업계는 "유류세 인하 없이는 휘발유 판매 가격을 크게 낮추기 어려운 구조"라고 강조했다.
석유화학 업계도 반발이 심하다. 석유화학 제품 가격이 수급상황에 따라 결정되기 때문이다. 석유화학 업계의 한 관계자는 "에틸렌·프로필렌·부타디엔 등 석유화학 기초원료와 이를 활용한 합성수지·합성섬유·합성고무 가격은 원유 가격보다도 수급상황에 따라 가격이 정해진다"며 "싱가포르 현물시장 등에서 가격이 결정되기 때문에 국내 기업들이 좌지우지할 여지가 없다"고 설명했다.
석유화학 기초원료 가격에는 이미 저유가 추세가 반영된 상태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지난해 11월 기준으로 기초화학제품의 생산자 물가지수 등락률은 전년 대비 -14.5%였다.
여기에 원유를 정제해 석유화학 제품을 생산하고 이를 최종 소비재로 만들기까지 시차가 있는데다 그 과정에서 유통비용 등 각종 변수가 개입되는 것도 가격 인하를 어렵게 한다는 주장이다. 석유화학 기업들은 정유업체가 원유에서 걸러낸 나프타를 사들여 에틸렌·프로필렌·부타디엔 등 기초원료를 생산한다. 이는 다시 각종 플라스틱과 화학섬유·합성고무 소재로 만들어 휴대폰 케이스나 의복, 각종 가전이나 자동차 등 최종 제품을 만드는 기업에 납품된다. 이 과정에서 수개월의 시간이 걸릴뿐더러 유통단계를 넘어갈수록 원유가 하락이 미치는 영향이 줄어들 수밖에 없다.
또 다른 석유화학 업계의 한 관계자는 "유가가 석유화학 제품에 반영되기까지 짧게는 한 달, 길게는 한 분기가 걸린다"며 "그동안의 시장 상황과 다른 비용 변동 등까지 반영해야 하기 때문에 유가가 50% 떨어졌다고 제품 가격이 똑같이 반으로 떨어질 수는 없다"고 잘라 말했다.
대기업 계열의 한 의류업체 관계자 역시 "의복을 화학섬유로만 만드는 것도 아니고 옷 가격에는 섬유 원가뿐만 아니라 유통수수료 등 다른 비용도 포함된 것"이라며 "유가 하락이 옷값에 미치는 영향은 미미하다"고 강조했다. 이 관계자는 "이 같은 현실을 무시한 채 가격 인하를 밀어붙이면 이는 오로지 인기영합적 정책에 불과하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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